23.02.26 예레미야 38장 1-6절 [십자가의 길] - 송준 목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남유다가 바벨론의 의해 멸망하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이때 남유다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전하며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고, 그렇게 예레미야는 끝까지 패역한 남유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레미야 선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유다 백성들은 끝까지 하나님께로 자신들의 삶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했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예레미야 38:6)

이 말씀처럼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붙잡아 진흙이 가득 찬 구덩이에 그를 던져 넣은 뒤 그 입구를 봉해버립니다. 그리고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난을 당한 것은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11장과 18장에는 예레미야가 사람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장면이 등장하고, 예레미야서 20장에는 예레미야가 바스훌이라는 대제사장에게 매를 맞고,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 매여 마치 짐승처럼 매여 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난은 남유다의 멸망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남유다의 멸망 이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벨론에 굴복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갖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예레미야는 이집트를 따르는 친 이집트파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가게 되고, 고대 전승에 따르면 결국 이집트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아픔을 겪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이런 한탄을 쏟아내기도 한 것이 예레미야 20장 14절과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예레미야 20:14)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예레미야 20:18)

이때 예레미야는 얼마나 힘들었던지 자신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까지 입에 담지요. 그만큼 그가 걸어온 길이 녹록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결코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레미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음란하고 더러운 문화 가운데에 자신을 맡겼던 사람도 아니었으며,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남유다 백성들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는 나라의 지도자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대언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처럼 죽기까지 온갖 고생을 다하고, 결국 마지막까지 고통 중에 있다가 비참하게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인생을 바라보며, 여기 우리는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한 가지 명제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라고 하는 명제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을 때,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고,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들이 잘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물질의 복을 받으셨습니까? 모두 건강하십니까? 모두 가정이 평안하고 좋은 일들만 있습니까?

물론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 서 있는 저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이런 류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읽은 성경에는 예수님을 잘 믿을 때, 삶이 윤택해지기보다 오히려 삶에 고난이 온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고난이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때로는 이 세상 그 자체의 악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도 있고, 또 때로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고난이 찾아올 때도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오늘 우리가 살펴본 예레미야 선지자의 삶은 예수님을 잘 믿고, 진심으로 그분의 길을 따르는 길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년 전에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선교사님을 도와드리며 1년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꽤 많은 선교사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선교사님들은 정말로 예수님을 잘 믿는 분들이지요. 그럼 예수님을 정말 잘 믿는 선교사님들은 정말 물질의 복을 받고, 늘 건강합니까?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모두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까요?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탄자니아에 있을 때, 한 번은 1년에 한 번 있는 선교사 수련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굉장히 충격적인 소식을 하나 전해 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선교사님의 따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참고로 그분은 탄자니아에서 이십여 년간 마사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시던 시니어 선교사님이셨습니다.

또 한 번은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사역하시는 한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북수단에서 사역을 하던 분이셨는데, 안타깝게도 이분은 선교지에 도착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그곳에서 아내를 잃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곳에 남아 묵묵히 선교사역을 펼쳐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여년 뒤, 그 선교사님 계셨던 북수단에 군부 구테타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선교사님은 오랜 시간 일구었던 선교의 터전을 군인들에게 다 빼앗기고 강제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교사님은 수단을 향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선교사님께서 자신의 딸을 데리고 몇 명의 동료 선교사님들과 함께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여행 중, 선교사님의 딸이 폭포에 휩쓸려 내려갔습니다. 이 사고로 선교사님은 딸을 잃게 되었고, 본인도 딸을 구하려는 과정에서 한 쪽 다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선교사님이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셨을 때, 그분께 다시 한 번 수단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남수단에 들어간 지 얼마 후, 이번에는 사역을 위해 함께 동행 했던 한 집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선교지에서 이런 일을 겪은 것은 방금 말씀드린 이 두 분뿐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러 아프리카에 가신 분들은 거의 대부분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하고 재산을 잃은 경험이 있고,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에 걸리는 것은 거의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으며, 믿었던 현지인들에게 배신을 당한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대체 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까?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선교사님들은 결코 당신들의 죄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겪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분들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은 이분들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온전히 따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선교지에 나가지 않고, 남들처럼 한국에서 살아갔다면, 이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저는 아주 높은 확률로 이들에게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을 때 고난이 온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선교지에 계신 선교사님들께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정말 예수를 잘 믿으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제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보통 직장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대개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꽉 막힌 사람이라는,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지요.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겉옷을 원하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내어 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지켜 내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정말 이 말씀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재산을 모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라고까지 말씀하시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걸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살 때 우리는 머지않아 모자란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우리를 굉장히 만만하게 생각하고, 더욱 부당하게 우리를 대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현재 개신교는 그 어느 때보다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정말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보면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가 금지된 국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는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잘 믿게 되면, 과거 예레미야 선지자나 선교사님들뿐만이 아니라, 여기 우리들에게도 고난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8-19)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평탄하고, 넓고, 고난이 없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좁고, 험하며, 고난이 동반되는 길임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7)

또한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이 곧 우리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드리는 순교의 길임을 우리에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평탄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 맥락을 같이하여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립보서 1:29)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4:13)

이처럼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고난이 온다는 명제가 틀린 명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거짓입니까? 예수를 믿는데도 고난이 온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이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라는 이 명제는 백번 천번 옳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틀린 것일까요? 그것은 복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는 복의 본질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처럼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소유하여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복의 본질은 죄로 인해 죽어야 할 내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존귀한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는 복의 본질이며, 기독교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본질은 이 세상이 추구하는 바와 완전히 다른 길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세상은 자신들과 다른 길로 걸어가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지요. 때로는 이 세상의 것이 더 좋은 것이라며 우리를 유혹하고,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고, 때로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걷는 우리들에게 고난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에만 소망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아 고난까지도 감내하는 그 길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길이며, 가장 복된 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이 있는 길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결코 이로 인하여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 고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기대하며, 바울처럼 이 소망으로 인하여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반면 지금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에게 어떤 고난도 없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진지하게 반추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어떤 고난도 없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삶이 아니라, 말로만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반증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과거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감없이 하나님의 뜻을 남유다 백성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아 내었고, 이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고난을 받은 것은 비단 예레미야 선지자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셉, 모세, 다윗, 욥과 같은 수많은 구약의 인물들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인해 고난을 경험했고, 베드로, 요한,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신약의 인물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감으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수많은 고난을 몸소 경험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그것은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이 고난 뒤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이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기쁨이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 오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이 고난을 자초하는 삶을 지향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고난이 내 믿음의 증표임을 믿으며, 기쁨으로 이 고난을 감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을 받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는 저와 우리 모든 강릉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