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근거이자 조건입니다.
믿음은 천국에서의 영생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중요한 세 사람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16:16)
두 번째는 베다니의 마르다의 신앙고백입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11:27)
세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의 신앙고백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20:28)
동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직관한 세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2000년 동안 수많은 신앙고백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나타시우스신경, 칼케돈신경,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도 있습니다. 모두 세 사람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삼아서 새롭게 표현되어진 신앙고백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 구주로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구원을 받는 줄 믿습니다.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가짐과 자세이며 구원의 유일한 도구입니다.
창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하시고 선포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목사님을 이것은 이신칭의 = 이신득의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주체, 믿음의 시제, 믿음의 내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믿음의 주체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세 제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후에 하산하셨습니다. 하산하고 보니 간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아들의 병을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간청을 하는데 아홉제자들이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가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대답하시자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여기서 믿음의 주체는 아버지 자신입니다.
병들어 매일 고통받고 있는 아들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 아버지가 예수님의 선교단체를 찾아온 것은 아들의 질병이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믿음에 방점을 두고 계십니다.
마틴 부버 목사님이 <Ich unt Du>라는 책에서 <나와 3인칭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 와 너> 1:1의 하나님, 2인칭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맺어져야 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사도신경의 서두는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틴어 CREDO입니다. <내가 믿습니다.>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그들이 믿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믿음의 주체가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믿습니다.>로 신앙의 주체가 자기 자신임을 고백하고 시작하는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예레미야 31:29-30)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에스겔 14:14)
강릉가족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온갖 능력을 행하시면서 항상 <너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느니라. 고침받았느니라.>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각자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의 시제
<내가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내가 이전에도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예수님을 만나는 날까지 변함없이 믿겠다는 불변의 결단과 약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잘 믿었는데 지금도 변함없이 신앙고백을 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잠든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믿겠다는 미래의 신앙고백 또한 증명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현재형이자, 현재진행형입니다.
유교는 행(行)을 강조하며 인간관계를 중요시합니다. 불교는 각(覺)을 강조하며 자신과의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기독교는 신<信>을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핵심으로 합니다. 인간관계든 자신과의 관계든 삶의 모든 기본은 관계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항상 현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은사로 믿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어디서 땀과 눈물과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면서 섬기고 전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이자, 신앙고백입니다. 믿음의 현 주소입니다.
믿음의 내용
믿음의 주체가 분명해야 합니다. 믿음의 시제도 분명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내용이 알차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믿음을 세 단어로 해석합니다.
지식(notitia), 동의(assensus), 신뢰(fidutia)
지식(notitia)
믿음은 무조건, 덮어놓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지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설명 가능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약속되어야 합니다.
동의(assensus)
동의는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공감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혼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서서>라는 단어는 현재완료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문밖에 서 계신 것입니다. <두드리노니>는 현재진형행입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계속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두드리실까요? 문이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만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줄 믿습니다.
신뢰(fidutia)
신뢰는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이요, 신뢰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세상 그 무엇보다 더 믿습니까? 신뢰합니까? 모든 것을 맡깁니까? 강릉가족들의 믿음은 지식을 넘어, 동의를 넘어, 완전한 신뢰, 온전한 의지, 은행보다 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근거이자 조건입니다.
믿음은 천국에서의 영생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중요한 세 사람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16:16)
두 번째는 베다니의 마르다의 신앙고백입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11:27)
세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의 신앙고백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20:28)
동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직관한 세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2000년 동안 수많은 신앙고백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나타시우스신경, 칼케돈신경,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도 있습니다. 모두 세 사람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삼아서 새롭게 표현되어진 신앙고백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 구주로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구원을 받는 줄 믿습니다.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가짐과 자세이며 구원의 유일한 도구입니다.
창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하시고 선포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목사님을 이것은 이신칭의 = 이신득의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주체, 믿음의 시제, 믿음의 내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믿음의 주체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세 제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후에 하산하셨습니다. 하산하고 보니 간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아들의 병을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간청을 하는데 아홉제자들이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가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대답하시자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여기서 믿음의 주체는 아버지 자신입니다.
병들어 매일 고통받고 있는 아들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 아버지가 예수님의 선교단체를 찾아온 것은 아들의 질병이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믿음에 방점을 두고 계십니다.
마틴 부버 목사님이 <Ich unt Du>라는 책에서 <나와 3인칭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 와 너> 1:1의 하나님, 2인칭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맺어져야 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사도신경의 서두는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틴어 CREDO입니다. <내가 믿습니다.>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그들이 믿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믿음의 주체가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믿습니다.>로 신앙의 주체가 자기 자신임을 고백하고 시작하는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예레미야 31:29-30)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에스겔 14:14)
강릉가족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온갖 능력을 행하시면서 항상 <너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느니라. 고침받았느니라.>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각자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의 시제
<내가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내가 이전에도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예수님을 만나는 날까지 변함없이 믿겠다는 불변의 결단과 약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잘 믿었는데 지금도 변함없이 신앙고백을 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잠든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믿겠다는 미래의 신앙고백 또한 증명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현재형이자, 현재진행형입니다.
유교는 행(行)을 강조하며 인간관계를 중요시합니다. 불교는 각(覺)을 강조하며 자신과의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기독교는 신<信>을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핵심으로 합니다. 인간관계든 자신과의 관계든 삶의 모든 기본은 관계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항상 현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은사로 믿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어디서 땀과 눈물과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면서 섬기고 전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이자, 신앙고백입니다. 믿음의 현 주소입니다.
믿음의 내용
믿음의 주체가 분명해야 합니다. 믿음의 시제도 분명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내용이 알차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믿음을 세 단어로 해석합니다.
지식(notitia), 동의(assensus), 신뢰(fidutia)
지식(notitia)
믿음은 무조건, 덮어놓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지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설명 가능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약속되어야 합니다.
동의(assensus)
동의는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공감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혼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서서>라는 단어는 현재완료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문밖에 서 계신 것입니다. <두드리노니>는 현재진형행입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계속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두드리실까요? 문이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만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줄 믿습니다.
신뢰(fidutia)
신뢰는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이요, 신뢰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세상 그 무엇보다 더 믿습니까? 신뢰합니까? 모든 것을 맡깁니까? 강릉가족들의 믿음은 지식을 넘어, 동의를 넘어, 완전한 신뢰, 온전한 의지, 은행보다 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