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9 사무엘상 1장 19절-28절 [가슴이 미어져 찢어져도 이별을 토로해라] - 성현모 목사

영적 암흑기 시대 신앙적 열심을 가지며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중앙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레위인 ‘엘가나’입니다. 그는 매년 성소가 있는 실로로 가족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올라갔습니다. 당시 실로는 이스라엘의 정규 예배처소가 있는 상징적인 장소 입니다. 사사시대 엘가나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예배드리기 위함 이었죠. 그런데 실로에 갈 때마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죠. 한나와 브닌나입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엘가나는 이 때문에 브닌나와 결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갈등의 원인은 아이가 있는 브닌나가 

한나를 자극 했다는 것이죠. 브닌나는 여인으로써 가장 소중한 자녀를 얻었지만 자신보다 한나를 사랑하는 남편 때문에 한나를 

힘들게 합니다. 한나 입장에서는 태의 문이 닫힌 것도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재앙인데 브린나의 괴롭힘까지 더하니 

그 고통이 갑절로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 아픔은 분명 단순한 어려움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마저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다는 먹먹함이 한나의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게 합니다.

 

실로에 가면 늘 제사를 드리고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가족들이 나눠먹게 되는데, 상처를 받은 한나는 먹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어떨까요? 두 부인 사이에 엘가나가 꽤 불편하겠죠. 엘가나는 나름 한나를 위로해보고 중재자 역할을 해보려 하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실로에 올라간다는 것은 가족이 예배드리고 기쁨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아픔과 상처가 반복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나는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참여는 하지만 가족들이 먹고 마신일 후에는 즉각 일어나서 기도하러 갑니다. 짐승 같은 울음으로 

아이를 달라고 한 두번 간구했던 것이 아니겠죠. 매번 마음을 쏟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그녀의 쓰린 마음이 달콤한 응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 아이이기에 떨리고 설레겠죠. 배가 불러오고 아이가 발길질하는 움직임이 너무 신비합니다. 매일 주어지는 아침이 선물입니다.

아기가 배속에 있는 10달 동안 한나는 애지중지 조심했을 것입니다. 아기가 무사히 잘 태어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

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답이 없는 하루를 살던 한나가 이제는 내일이 기다려지는 오늘을 삽니다.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드디어 생명이 태어납니다. 하나님 주신 아기가 한나 옆에서 자고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심장 뛰는 가슴에 손을 올려보기도 했을 것이고 자고 있을 때 작은 손을 잡아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귀하고 소중

하고 예쁜 내 아기... 자다가 조금만 아이가 움직여도 한나는 바로 깨지 않았을까요? 엄마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얻은 귀한 아들을 너무나 허탈하게 젖을 떼자마자 제사장에게 맡기려 합니다. 서원했기 때문이죠.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무엘 상 1:26-28)

 

아무리 서원을 했다고 해도... 다시 한번 기도해볼 수는 없을까요? 조금만 더 키우다가 약속을 지키면 안 될까요? 사실 레위인들은

25세에서 50세까지 성소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 까지 한나가 잘 키우다가 25세에 맡겨도 되는거 아닐까요?

기도했다는 이유로 아이와 생이별 한다는 게 너무 가혹한거 같습니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냥 감사헌물정도만 

해도 되잖아요. 충분히 하나님께 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다른 방법이 정말 전혀 없을까요?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 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사무엘상 1:24)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아이는 얼마나 흐느끼며 울었을까요?

어린 아기에게 엄마의 품과 엄마의 심장소리가 전부인데... 엄마가 나를 두고 갑니다. 잠깐보이지 않아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마음과 시선으로 엄마를 찾던 아이에게 이별은 너무 힘듭니다. 감당하기에 버겁습니다. 잠잘 때도 일어나서도 엄마와 

한 몸인데, 그런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어린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상실됩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캄캄

할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엄마와의 분리를 막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그런 아이를 뒤로 

하는 한나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냥 평범하게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싶지 않을까요? 얼마나 힘들게 

얻은 아들인데요. 이제 가슴에 묻어야 합니다.

 

결국 한나는 그렇게 사무엘을 두고 오게 됩니다. 평생!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많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집에 가서 사무엘과 있었던 그 짧은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라니 있었을 것입니다. 아기가 입던 옷, 귓가에 맴도는 아기의 울음소리.. 웃음소리

얼마나 공허했을까요... 잠을 잘 때도 항상 옆에 있었던 아기가 이제 없습니다.

 

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주저앉아 아파하며 힘들었을 한나

그런데 그렇게 그녀는 성경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외롭고 공허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백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2장의 한나의 기도입니다.

 

2장에서의 기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절망 대신에 감사가 채워지고 불안감이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깁니다.

분명 자신을 슬픈 여자라고 엘리에게 소개했던 여인은 이제 더 이상 슬픈 여자가 아닙니다.

한나 개인의 기쁨이 아니라 나아가서 한나가 속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 미래에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든 것입니다. 전구속사의 일들을 예언적으로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할 왕에 대한 예언까지 포함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나와 사무엘의 이별이 만들어낸 희망과 기적은 어떤 것일까요?

한나의 태의 문이 닫혀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닫혀 진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백성의 죄가 완악하고 많아도... 왠만하면, 예언자도 보내주고 선지자도 보내고

말씀을 깨닫게 보여주시고 말씀해주시는데 그 모든 것이 단절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슬프고 고달프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희망과 기적을 이미 예비하고 계셨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평범한 한 여인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별이 만들어낸 희망과 기적’입니다.

이 이별은 결국 서원에 대한 순종이죠. 슬픔과 괴롬과 탄식에 무너져갔던 여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슬픔의 눈물을 닦아내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별,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은 이별입니다. 익숙하고 편하고 당연한 것들과 이별하는 것이죠.

정신 분석가들은 이별에서 필요한 감정의 대체물을 슬픔 그 자체라고 합니다. 쉬운 이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별은 단절입니다. 상실감 슬픔 그리움 가슴에 남아있겠죠. 우리는 다양한 이별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그 이별에 아픔 없는 성숙한 이별은 없을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마지막 작품 ‘멕베스’에서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슬픔을 토로하라... 그렇지 않으면 슬픔에 가슴이 미어져 찢어지고 말테니...’

 

슬픔은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슬픔입니다. 무겁습니다. 힘듭니다.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쉬운 순종 없습니다. 쉬운 게 아니니까 순종이죠.

가장 가치 있는 순종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것조차 내려 놓는 것이죠. 그래서 슬픕니다.

내려놓으면 생소하고 겁이 나고 두렵고 불편할 거 같습니다.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 내가 다른 건 다 순종하겠는데 진짜 이건 정말 안 되는 거...

내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그 모든 것과 이별하는 것이죠. 그래서 슬픕니다.

 

우리는 순종이 많이 약해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한나가 살았던 시대는 말씀이 부재한 희귀한 시대였지만, 우리가 사는 오늘은 말씀이 풍성한 시대입니다.

손가락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말씀과 좋은 설교도 마음껏 언제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이 메마른 시대를 살아갑니다. 우리의 귀와 지성의 수준은 높아지는데 왜 순종은 잘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게 순종이라는 것을 분명 아는데...

왜 순종이 잘 안 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가 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 말씀을 보는 눈은 높아지면서 그 말씀대로 살려는 치열함보다

머리로만 아는 말씀이 너무 편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단순히 추가적인 성경지식이 쌓이면서 마음의 위로가 되고 안도감이 

주어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순종해야 겠구나 감정적 다짐만 하는 것이 고질 병이된 것이죠. 그냥두면 불치병이 될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말씀의 홍수 속에 내가 듣고 싶고 내가 적용하고 싶은 것만 성급하게 합리화 하다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내 기준대로 하나님 말씀을 포장하게 됩니다. 말씀을 아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순종은 쉬운 게 아닙니다. 정말 힘든 겁니다. 대가가 필요합니다. 고통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가장 소중한 것과 이별하는 한나를 깊이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순종은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거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순종은 우리의 이성과 이해를 뛰어 넘는 거라 하는데요...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순종은 우리의 이성과 이해와 

이별하는 것이라고 내가 원하는 것, 그렇게 바라는 것을 떼어내고 너무나 깊은 상실감을 감당하는 것 하지만 그 슬픔의 빈자리를 

하나님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선물들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한나가 가장 소중한 아들을 이별하며 하나님께 보냈다면, 하나님 역시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냥 보내기만 하신게 아니라 십자가 형벌까지 감당케 하셨죠. 그 순간 누가 가장 마음이 아팠을까요? 슬퍼했을까요? 

우리를 사랑하기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태초부터 불순종했고 불순종하고 있는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 

최고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속아 주시는거죠. 순종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이 순종하길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을 위해 이별하기 힘든 부분들을 내려놓다보면,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 세상 계산기로 두들길 수 없는

소중함들이 그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희망과 소망과 위로와 기적이 차고 넘칠 줄로 믿습니다.


한나는 슬픔에 함몰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슬픔의 한 가운데서 깨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슬픈데 씩씩합니다. 그 이유는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기 쉬운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입니다. 오늘 이별하시기 바랍니다.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이별하시겠습니까? 

가장 이별하기 힘든 것 네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은 아시겠죠.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 분명 

있습니다. 여러 개 필요 없습니다. 딱 하나만 기도하시며 고민하시며 그 순종의 기회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익숙해지면 

불순종이 어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은 열정으로만 채워 지는게 아니라 진짜 다 맡겨야 이루어집니다. 한나가 마지막에 

서원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저 무모한 서원기도로 끝났을 것입니다.

 

순종이 만들어낸 희망과 기적을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 가시는 한주 되 시길 축복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리는 귀한 순종으로 나아가시는 우리 모든 강릉 식구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