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8 열왕기상 16장 29-34절 [부창부수 팽생왠쑤]

夫唱婦隨 와 平生怨讐부창부수

夫唱婦隨: 남편이 노래를 부르면 아내도 따라 부른다.

남편이 이야기 하는 것은 아내도 동의하면서 따르는 관계가 원만한 부부관계.

 

오늘은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강릉교회의 부부들은 夫唱婦隨입니까? 平生怨讐입니까? 아니면, 더 살아봐야 합니까?

한 사람은 <夫唱婦隨>라고 대답하고, 다른 한 사람은 <팽생왠쑤>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강릉가족 여러분은 <팽생왠쑤>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고 서로 살아가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살아가면서 <夫唱婦隨>로 행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열왕기상 16:30-34)


북 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은 바알 종교의 본산지 두로와 시돈에서 바알의 제사장 겸 왕으로 군림하던 엣바알의 딸 아세벨의 미모에 현혹되어서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이 결혼은, 당시 페니키아 문명권의 부강한 나라 시돈을 비롯한 아람 및 하맛과 군사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북방의 강적 살만에셀 3세의 앗수르 왕국의 남진을 박아야 하는 아합왕의 입장에서 볼 때 성공적 북방외교였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을 통해 바알 종교의 왕이자 제사장의 딸이 이스라엘의 왕비가 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명적인 불신앙과 배교를 이끈 가장 불행한 결혼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시집오자마자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사마리아 왕궁에 바알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불러들여 궁중경비대로 세웠습니다. 이세벨은 간악한 방법으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 왕에게 선물했고, 야웨의 토지법을 고수한 나봇은 돌에 맞아 순교당합니다. 

아들의 이름을 <아하시야=나의 힘이 되신 야웨><요람=높으신 야웨>라고 짓고, 나봇 살해사건 후에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금식하며 회개할 정도로 신앙을 과시했던 사람이 아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을 버리고 배교하고 타락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결국 아합은 금욕적 금지조항이 많은 야훼 종교보다는 물질 만능과 쾌락의 바알 종교가 더 좋았고, <엣바알=바알의 증인>의 딸인 이세벨<이세불=높으신 분/바알이 어디 계신가>의 감언이설을 택했습니다. 이 둘은 그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대표적 부부였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아합왕을 '종교 다원주의자의 선구자'로 보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열왕기상 21:25)

아합과 이세벨 부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 당한 부창부수였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사도행전 18:1-3)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사도행전 18:24-26)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로마서 16:3-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부부는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신실한 믿음의 부부였습니다. 자신의 생업에도 신실하고, 성경에도 능통하고 그렇다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거나 자신을 내 세우지 않고 언제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섬기고 돕는 일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땀과 눈물과 시간과 물질로 섬기는 夫唱婦隨였습니다. 섬김과 나눔에는 충성으로 헌신하면서도 항상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른 사람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메꾸어 주는 부부였습니다.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기꺼이 내놓았을 뿐 아니라 바울목사님과 복음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은 신실한 부부였기에, 사도 바울목사님께서 극찬하면서 꼭 인사할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강릉의 모든 부부들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같이 신실한 믿음의 부부들 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입니다.

 

아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남편>입니다.

남자의 길에서 여자는 에피소드가 될지 몰라도 여자의 길에서 남자는 헐스토리가 됩니다. 내가 남편으로부터 가장 받기 원하는 선물은 <든든함>입니다.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고, 흔들리지 않는 바람막이가 되고, 아내에게 다른 큰 도움은 주지 못해도 최소한 든든한 맛 하나는 주어야 하는 것이 남편입니다. 즉, 언제나 아내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든든한 ‘아내의 내 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잘못했을 때는 남편의 든든함을 보여주어 아내에게 감동을 줄 좋은 기회이지 아내의 잘못을 꼬집어 아내의 기를 죽일 절호의 찬스가 아닙니다. 아내의 마음에 <캄캄함과 갑갑함>을 주는 남편의 행동은 바로 <깐깐한 행동>입니다. <깐깐함>은 갑갑한 세상을 사는 데는 혹시 필요할 수 있어도 아내를 대할 때는 결코 필요 없는 것입니다. 남편은 <꽉 막힌 갑갑하고 깐깐한 존재>가 되기보다는 <꽉 찬, 든든한, 믿음직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꽉 찬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넉넉한 이해심>이 필요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감정과 정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머리가 나빠 이해력은 부족해도 마음이 좋아 이해심은 풍성해야 합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이해하기 힘든 특별한 감정과 정서가 있습니다. 남편은 이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아내가 자기의 감정을 너무 내세우는 것도 문제지만 남편이 아내의 감정을 너무 받아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원료는 열정이라기보다 이해입니다. 이해의 깊이가 사랑의 척도입니다. 이제 아내를 이해하고 아내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는 강릉교회 남편들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나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로 인해 작은 미소라도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설령 살아가는데 큰 의미는 아닐지언정 한 가닥 연한

당신의 즐거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 오는 밤 창가에서

빗줄기 넘어 희미한 호수를 바라보며

행여 삶이 지치고 외롭다고 느낄 때

잠시 나마 나를 기억해 주시고 당신의 그 시름을 잊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   중략

당신이 나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