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이 될까요?
믿음은 100%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시작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은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 사흘 만에 사망권세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신 그 분. 부활하시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가 나를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 그 분을 구세주이심을 믿고 천국을 향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이 세상을 사는 길입니다.
믿음은 100% 부활로 시작됩니다.
<부활>은 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열한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한 주동자들을 찾아서 보기 좋게 복수혈전을 펼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배신하고 도망쳐서 비겁하게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서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러셨을까?
핵심은 기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 이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고 기뻐했지만 결코 주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여 줄 때는 토끼 눈을 뜨고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지옥이라도 따라갈 듯이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잡히시고 심문 당하시고 처형 당할 때는 제자들까지 배신했으니 나머지 유대 백성들은 물어볼 것 없습니다.
먹은 빵은 이미 잊혀졌고, 치유와 이적은 이야기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치유의 은혜와 복을 잊을 수가 없는 막달라 마리아, 나사로, 바디메오, 38년 된 중풍병자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 니고데모와 같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준비하고 찾아간 여인들과 함께, 미쳐 성경에 기록되지 못한 수 많은 헌신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묘하게도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대비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관원들이 부활 상황에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활>이 사람들뿐 아니라 온 우주에 엄청난 션세이션을 일으킨다는 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사탄의 지상 대리자를 <짐승>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짐승의 상처 입은 머리 가운데 하나가 죽은 척하다가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사탄을 따라고 숭배하게 합니다.
계13:3-4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짐승은 교묘하게 부활의 효과를 노림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르는 것은 참 믿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기적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흉내를 낼 수도, 조작할 수도 없습니다.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독생하진 아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증거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비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창세기 1:1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부활에서 또 믿음의 절벽을 만나기 때문에 믿음의 길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시에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총독, 로마 관료들, 대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파 사람들 앞에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면 순식간에 유대사회와 로마전역에 지난번 들불처럼 퍼지지않겠습니까?
하지만 불순종이 본질인 인간은 초 자연적, 초 과학적, 초 이성적인 것은 부모가 말해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창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도 믿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형제자매가 전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절친 중의 절친인 친구가 전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만을 찾아가신 특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부활은 기적적인 사건만으로 한정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일, 세상에서 행하시고 가르치며 살아가신 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늘나라로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신 일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이전과 이후 모든 일들의 연속선상에서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한 부분으로 결코 온전한 복음증거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1:21-22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전체에 대해 목격자와 증언자가 돼야 하고, 특별히 부활의 증언자가 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제자도의 완성을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제자들을 선택할 때는 스승을 기쁘시게 하고, 스승을 자랑스럽게 하고, 스승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할 실력과 능력과 가문과 배경을 고려해서 선택합니다. 세상 기준으로 예수님도 제자를 선택했다면 그 잘난 제자들이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합당한 제자의 삶을 살았을까요? Never. 예수님의 선택도 제자들도 탁월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삶의 변화, 복음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 헌신, 순종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부를 주셨기에 제자들도 탁월한 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3년 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예수님을 닮아 제자들도 복음의 완성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쳐 살다 예수님 만나서 천국가셨습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오늘도 넓은 길을 포기하고 좁을 길을 선택해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런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이 길을 걷지 않겠느냐?>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과 함께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대한민국 강릉 땅에 살고 있는 나를 찾아오셨습니까?
나를 통하여 내 부모형제, 가족에게 복음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강릉 땅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나에게 제자의 길을 따라 걸을 것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처럼 목숨바쳐 복음의 증인으로 남은 생애 살아가는 강릉가족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Sola Scriptura
Sola Christus
Sola Gracia
Sola Fide
Soli Deo Grolia
생명 살리기 예배자 세우기
강릉도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10
강릉행전 등록일만, 출석오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인을 남기리라
열왕기상 19:18
그날을 기둘리믄성~~!!!
오늘도 주님 앞에 어떻게 서야할지 서성이고 있습니다~
믿음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이 될까요?
믿음은 100%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시작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은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 사흘 만에 사망권세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신 그 분. 부활하시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가 나를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 그 분을 구세주이심을 믿고 천국을 향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이 세상을 사는 길입니다.
믿음은 100% 부활로 시작됩니다.
<부활>은 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열한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한 주동자들을 찾아서 보기 좋게 복수혈전을 펼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배신하고 도망쳐서 비겁하게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서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러셨을까?
핵심은 기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 이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고 기뻐했지만 결코 주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여 줄 때는 토끼 눈을 뜨고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지옥이라도 따라갈 듯이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잡히시고 심문 당하시고 처형 당할 때는 제자들까지 배신했으니 나머지 유대 백성들은 물어볼 것 없습니다.
먹은 빵은 이미 잊혀졌고, 치유와 이적은 이야기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치유의 은혜와 복을 잊을 수가 없는 막달라 마리아, 나사로, 바디메오, 38년 된 중풍병자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 니고데모와 같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준비하고 찾아간 여인들과 함께, 미쳐 성경에 기록되지 못한 수 많은 헌신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묘하게도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대비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관원들이 부활 상황에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활>이 사람들뿐 아니라 온 우주에 엄청난 션세이션을 일으킨다는 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사탄의 지상 대리자를 <짐승>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짐승의 상처 입은 머리 가운데 하나가 죽은 척하다가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사탄을 따라고 숭배하게 합니다.
계13:3-4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짐승은 교묘하게 부활의 효과를 노림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르는 것은 참 믿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기적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흉내를 낼 수도, 조작할 수도 없습니다.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독생하진 아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증거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비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창세기 1:1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부활에서 또 믿음의 절벽을 만나기 때문에 믿음의 길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시에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총독, 로마 관료들, 대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파 사람들 앞에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면 순식간에 유대사회와 로마전역에 지난번 들불처럼 퍼지지않겠습니까?
하지만 불순종이 본질인 인간은 초 자연적, 초 과학적, 초 이성적인 것은 부모가 말해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창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도 믿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형제자매가 전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절친 중의 절친인 친구가 전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만을 찾아가신 특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부활은 기적적인 사건만으로 한정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일, 세상에서 행하시고 가르치며 살아가신 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늘나라로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신 일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이전과 이후 모든 일들의 연속선상에서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한 부분으로 결코 온전한 복음증거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1:21-22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전체에 대해 목격자와 증언자가 돼야 하고, 특별히 부활의 증언자가 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제자도의 완성을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제자들을 선택할 때는 스승을 기쁘시게 하고, 스승을 자랑스럽게 하고, 스승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할 실력과 능력과 가문과 배경을 고려해서 선택합니다. 세상 기준으로 예수님도 제자를 선택했다면 그 잘난 제자들이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합당한 제자의 삶을 살았을까요? Never. 예수님의 선택도 제자들도 탁월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삶의 변화, 복음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 헌신, 순종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부를 주셨기에 제자들도 탁월한 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3년 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예수님을 닮아 제자들도 복음의 완성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쳐 살다 예수님 만나서 천국가셨습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오늘도 넓은 길을 포기하고 좁을 길을 선택해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런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이 길을 걷지 않겠느냐?>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과 함께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대한민국 강릉 땅에 살고 있는 나를 찾아오셨습니까?
나를 통하여 내 부모형제, 가족에게 복음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강릉 땅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나에게 제자의 길을 따라 걸을 것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처럼 목숨바쳐 복음의 증인으로 남은 생애 살아가는 강릉가족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Sola Scriptura
Sola Christus
Sola Gracia
Sola Fide
Soli Deo Grolia
생명 살리기 예배자 세우기
강릉도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10
강릉행전 등록일만, 출석오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인을 남기리라
열왕기상 19:18
그날을 기둘리믄성~~!!!
오늘도 주님 앞에 어떻게 서야할지 서성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