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첫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자신의 정의를 내리고 확정한 후에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어디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지가 어딥니까?
오늘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이 어떤 곳인지?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강릉 땅이 어떤 도성인지 확인하고 각자의 인생을 그대로 살든지? 수정하고 보완해서 살든지? 새로운 길을 모색하든지? 생각도 많이 하시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10년 후쯤 그때 <내 인생을 쭈욱 변함없이 잘 살았다. 그때, 내 인생을 잘 바꾸었다. 그때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지 정말 수정을 잘 했다.> 이런 신앙고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릉 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이 지금보다 10년 후 즈음, 모든 면에서 더 풍성하고 복 되시길 축복합니다. 10년 후에 하나님의 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오늘부터라도 씨앗을 잘 뿌리고 가꿔야 합니다. 무릎 꿇어 기도로 여러분의 인생을 개척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 부활승천 하실 때, 제자들이 살고 있던 유대 땅, 예루살렘 도성의 상황을 살펴 봄으로써 2024년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남은 인생, 믿음의 작전을 잘 세워보시길 축복합니다.
예루살렘 = 거룩한 성<聖都>
마태복음 23장 29절 이하에서 2000여년 전의 예루살렘 도성의 영적인 상황을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아버지 다윗 왕이 건축 자재를 완벽하게 준비해두었습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들은 1년 세 번은 꼭 이 성전에 자신의 몸을 여호와 하나님께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런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한 성이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특별히 구별한 곳인데 시장 골목이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는 드리지 않고 탐욕의 장사꾼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찬양과 기도가 넘쳐야 할 성전 뜰에는 욕망에 찬 인간들의 흥정하는 아우성만 가득했습니다. 거룩한 재물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짐승들의 울음소리만 가득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제사가 사라졌습니다. 선지자를 죽이는 도성,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는 성이었습니다. 불법이 난무하고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불평,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습니다. 소망은 사라지고 절망이 가득한 도성이었습니다. 생명과 기쁨은 사라지고 사망과 애통에 휩싸인 도성이었습니다. 2000년 전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탐욕의 도성이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곳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뜻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의 무덤이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파송한 믿음의 사람들의 핍박과 박해로 순교 당하는 도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마 23:49)
이 성에 머물라.
인간은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땅으로 이사를 갑니다. 내가 실패하고 나를 절망케 한 땅에 계속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3년 동안이나 모든 것을 버리고 랍비 예수님을 추종한 제자들에게 지금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 아니라 죽음과 절망의 도성입니다. 단 한 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아니 지체하다가는 자신들도 붙잡혀서 어떤 곤욕을 치를지 불안합니다. 제자들은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성에 머물라!
이 죽음과 절망의 도성에서 머물러 기도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절망이 희망이 되었습니다. 포기가 용기가 되었습니다. 이 하늘의 영광과 능력을 회복하셔서 아버지의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조국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현주소 강릉도성은 어떤 도시입니까? 우리의 교회 강릉교회는 어떻습니까?
절망이 가득합니까? 희망이 보입니까? 불법과 불의가 판을 칩니까? 정직과 성실이 빛을 발합니까? 슬픔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까? 생명과 기쁨이 약동하고 있습니까? 시기와 미움이 가득합니까? 사랑과 따스함이 흐르고 있습니까? 계속 살고 싶습니까? 빨리 떠나고 싶습니까?
떠났던 제자들이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희망이 사라져서 예루살렘을 떠났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다시 이 죽음과 절망의 도성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죽음의 도성으로 돌아옵니다.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도성을 떠났던 제자들이 하나 둘 되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내 시각으로 세상을 봅니다. 내 생각으로 세상을 담습니다. 내 가치관으로 판단합니다. 내 믿음의 신앙고백으로 살아갑니다.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의 원인과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사는 인간은 육으로만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면 근심 걱정도 두려움도 점점 멀어집니다. 부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감사의 기도 제목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강릉 도성은 죽음으로 결론짓는 세상입니다. 이런 죽음과 절망의 강릉 도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무장하셔서 모든 근심, 걱정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생명의 복음의 증인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첫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자신의 정의를 내리고 확정한 후에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어디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지가 어딥니까?
오늘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이 어떤 곳인지?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강릉 땅이 어떤 도성인지 확인하고 각자의 인생을 그대로 살든지? 수정하고 보완해서 살든지? 새로운 길을 모색하든지? 생각도 많이 하시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10년 후쯤 그때 <내 인생을 쭈욱 변함없이 잘 살았다. 그때, 내 인생을 잘 바꾸었다. 그때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지 정말 수정을 잘 했다.> 이런 신앙고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릉 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이 지금보다 10년 후 즈음, 모든 면에서 더 풍성하고 복 되시길 축복합니다. 10년 후에 하나님의 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오늘부터라도 씨앗을 잘 뿌리고 가꿔야 합니다. 무릎 꿇어 기도로 여러분의 인생을 개척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 부활승천 하실 때, 제자들이 살고 있던 유대 땅, 예루살렘 도성의 상황을 살펴 봄으로써 2024년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남은 인생, 믿음의 작전을 잘 세워보시길 축복합니다.
예루살렘 = 거룩한 성<聖都>
마태복음 23장 29절 이하에서 2000여년 전의 예루살렘 도성의 영적인 상황을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아버지 다윗 왕이 건축 자재를 완벽하게 준비해두었습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들은 1년 세 번은 꼭 이 성전에 자신의 몸을 여호와 하나님께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런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한 성이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특별히 구별한 곳인데 시장 골목이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는 드리지 않고 탐욕의 장사꾼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찬양과 기도가 넘쳐야 할 성전 뜰에는 욕망에 찬 인간들의 흥정하는 아우성만 가득했습니다. 거룩한 재물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짐승들의 울음소리만 가득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제사가 사라졌습니다. 선지자를 죽이는 도성,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는 성이었습니다. 불법이 난무하고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불평,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습니다. 소망은 사라지고 절망이 가득한 도성이었습니다. 생명과 기쁨은 사라지고 사망과 애통에 휩싸인 도성이었습니다. 2000년 전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탐욕의 도성이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곳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뜻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의 무덤이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파송한 믿음의 사람들의 핍박과 박해로 순교 당하는 도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마 23:49)
이 성에 머물라.
인간은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땅으로 이사를 갑니다. 내가 실패하고 나를 절망케 한 땅에 계속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3년 동안이나 모든 것을 버리고 랍비 예수님을 추종한 제자들에게 지금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 아니라 죽음과 절망의 도성입니다. 단 한 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아니 지체하다가는 자신들도 붙잡혀서 어떤 곤욕을 치를지 불안합니다. 제자들은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성에 머물라!
이 죽음과 절망의 도성에서 머물러 기도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절망이 희망이 되었습니다. 포기가 용기가 되었습니다. 이 하늘의 영광과 능력을 회복하셔서 아버지의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조국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현주소 강릉도성은 어떤 도시입니까? 우리의 교회 강릉교회는 어떻습니까?
절망이 가득합니까? 희망이 보입니까? 불법과 불의가 판을 칩니까? 정직과 성실이 빛을 발합니까? 슬픔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까? 생명과 기쁨이 약동하고 있습니까? 시기와 미움이 가득합니까? 사랑과 따스함이 흐르고 있습니까? 계속 살고 싶습니까? 빨리 떠나고 싶습니까?
떠났던 제자들이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희망이 사라져서 예루살렘을 떠났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다시 이 죽음과 절망의 도성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죽음의 도성으로 돌아옵니다.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도성을 떠났던 제자들이 하나 둘 되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내 시각으로 세상을 봅니다. 내 생각으로 세상을 담습니다. 내 가치관으로 판단합니다. 내 믿음의 신앙고백으로 살아갑니다.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의 원인과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사는 인간은 육으로만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면 근심 걱정도 두려움도 점점 멀어집니다. 부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감사의 기도 제목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강릉 도성은 죽음으로 결론짓는 세상입니다. 이런 죽음과 절망의 강릉 도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무장하셔서 모든 근심, 걱정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생명의 복음의 증인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