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없으면 우리는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질문이 없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언제 질문합니까? 관심이 있는 것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할 때 질문합니다. 즉, 자신과 관계가 있거나 마음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질문을 한다 라는 것이지요. 뒤집어서 말해보면, ‘우리는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않는다.’ 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을 존중하는 사람은 자신 앞에 찾아오신 성삼위 하나님께 질문을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질문합니다. 질문하고 또 질문합니다. 관심이 있으면, 그 대상을 향해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 질문을 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일률적으로, 그리고 함부로 판단할 순 없겠지만, 이것은 성삼위 하나님께 별다른 관심이 없는 그 내면의 상황에 대한 반증 아니겠습니까?
성도님들께서는 우리 삶의 자리에 매 순간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예수님께, 그리고 성령님께 질문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의 전환점이 시작 되어지는 부분입니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유명세의 정점에 다다르고 계셨습니다. 마가복음 1-8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공생애 시기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진리를 그 땅에 선포하셨고, 정신 질환 및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던 이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이렇게 삶의 현장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실제로 일으켜 나가시니, 그 당시 고통 받던 민중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꽃이 만발한 길 위를 걷는 듯한 상황 속, 예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 라는 지방에 속한 마을들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국경지역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게 봉헌되었던 그런 도시였습니다. 유대 문화가 담긴 분위기 그보다 훨씬 화려한 로마 제국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국경지대에 세워져 있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이 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 : 27)
제자들은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스승에 대한 평가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가 헤롯 안티파스에게 죽임당한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이라 하기도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라고 하며 스승의 질문에 답을 합니다. 그 당시 민중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를 그런 선지자 정도로 많이들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시고 다시금 제자들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그 장면은 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 : 29)
많은 이들이 선지자 정도로 여기고 있던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스승 예수를 ‘그리스도’라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의 답을 듣게 된 예수께서는, 그 답에 대한 평가나 다른 말씀 하지 않으시고, 베드로가 자신을 향해 고백한 그 발언을 비밀로 하라 말씀하십니다. 왜 비밀로 하라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그 발언이 빌립보 가이사랴 라는 지역에서 언급하기에 너무나도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위험한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지역은, 분봉왕이긴 했지만 분명 헤롯가문 출신의 왕이 번듯이 존재하고 다스리는 그런 왕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은 그 당시 신으로 여겨졌던 로마 황제에게 봉헌 된 신전이 있던 그런 기념비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헤롯도 아니고, 황제도 아닌, 예수가 진정한 왕이다!’라는 메시지가 퍼져나갔다면 아마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저 한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하늘의 보내심을 받은 것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불필요한 소요와 희생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발설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 : 31)
‘당신은 우리의 참된 왕이십니다.’ 라는, 분위기를 참 훈훈하게 하는 고백에 대한 답변으로써, ‘인자는 처참한 고난을 받고, 장로와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정죄 받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32절에 베드로의 반응이 나옵니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 : 32)
불과 몇 초 전, ‘당신은 참된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이가, 그 ‘참된 왕’ 붙들고는 ‘당신 그러면 안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왕을 붙들고 항변하는 모습 속, 절박함이 느껴지십니까? 제자들은 파트타임으로 예수를 따라다닌 것도 아니고, 부업으로 예수를 쫓아다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르고 있는 그런 이가, 머지않아 고난 받고 죽게 될 것이란 소리를 그 당사자 입에서 듣게 되었을 때, 어찌 절박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충격적인 발언에 이성을 잃고 스승을 붙들고 항변하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그것이 33절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 : 33)
베드로, 그리고 행동만 하지 않았을 뿐 베드로와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향해 뭐라고 꾸짖으십니까? ‘사탄’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사탄이라 표현된 단어는 우리말로 ‘고발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의 잘못을 꼬투리 잡아서 하나님께 고발하는, 그리하여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존재를 두고 성경은 고발자, 즉 사탄이라 칭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던질 마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는 다니고 있었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전혀 몰랐습니다. 자신이 상상하고, 스케치하고 만들어낸 상상 속 예수는 알고, 믿고, 따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모든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모든 이를 자유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그런 상태였다 라는 것이지요. 3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 : 34)
쉽게 말해서 제자들이 만든 예수 이미지 말고, 제자들이 상상하는 예수의 모습 말고, 사람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예수 형상 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드러난 있는 그대로의 예수 당신을 따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각자가 전 존재를 걸고 있는 그대로의 예수 자신을 따라오라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다양한 상황 속에서 계속 따르고자 한다면, 수많은 삶의 자리 가운데 순전하게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복잡한 인생사 속에서 흔들리지만, 비틀거리면서도 온전히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 분께 계속 질문해야 하는 것이지요. 여쭤 봐야 하는 것이지요. 끝없이 그 분과의 관계성을 구하며 여쭤봐야 하는 것이지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이 상황 속,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 속,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시대의 아픔을 직면하고 있는 이 순간,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타인이 고난을 겪고 있는 순간을 바라보는 지금, 오늘 여기에서,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갈 길 몰라 헤메이고 있는 이 순간 속,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이 질문을 예수께 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바로 이 ‘나를 따르라.’라는 것이지요. 원문을 직역해 보면 ‘내 뒤에 서라.’라는 말씀입니다. 질문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를 온전히 알 수 있으며, 예수를 온전히 알지 못한 상태로 어찌 참된 예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고서 어찌 예수 뒤에서 그 분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이건 상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요? 질문하는 이에게 말씀이라는 진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예수를 만나고, 그리고 그 계시 된 말씀을 육신 속에 녹여낼 때, 그 말씀을 살아낼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분명한 예수를 만나고, 온전히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질문의 귀결인 나를 따르라 라는 명령 앞에 우리가 온전히 설 때에, 누릴 수 있는 그 구원의 단적인 예가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됩니다. 35-3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 : 35-38)
아멘. 여전히 우리 인생의 구원자 되신 예수께 물어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시대 정신에 휩쓸려 사는 이들은, 기존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인슈타인도 말했지요.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 이다. 똑같은 방법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정신병자다. 라고 말입니다. 과거와 동일한 자세로 사는데, 무언가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이의 생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의 뜻이 우선이 아니라, 먼저 예수께 여쭙고, 예수를 알고 그를 통해, 그 분을 통해 계시된 하늘의 뜻을 따를 때,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예수를 따를 때에,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되찾게 될 것임을 제자들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사람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게 된다 하더라도, 온전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주어진 가치 누릴 줄 모르고 살아가는 그보다 더 허망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삶에 찾아오신 예수. 그분께 끊임없이 질문하셔야 합니다. 타자를 향한 진중한 질문은 서로의 관계를 풍성케 하는 것처럼, 진실로 우리게 찾아오신 예수 안에 살고 싶으시다면, 예수와 함께 동행하고 싶으시다면, 예수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예수께서 베푸시는 그 구원의 역사를 오롯이 누리고 싶으시다면, 질문하셔야 합니다.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수 많은 상황 속,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을 드릴 때, 비로소 우리 앞에서 우리 생을 이끄시며 온전하게 하시고, 주어진 가치를 있는 그대로 누릴 수 있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히브리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모세가 봤던 그 등과 동일하게 생긴 그 등 말입니다. 그 등 뒤에 섰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온전함으로 이끄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입니다.
질문이 없으면 우리는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질문이 없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언제 질문합니까? 관심이 있는 것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할 때 질문합니다. 즉, 자신과 관계가 있거나 마음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질문을 한다 라는 것이지요. 뒤집어서 말해보면, ‘우리는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않는다.’ 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을 존중하는 사람은 자신 앞에 찾아오신 성삼위 하나님께 질문을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질문합니다. 질문하고 또 질문합니다. 관심이 있으면, 그 대상을 향해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 질문을 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일률적으로, 그리고 함부로 판단할 순 없겠지만, 이것은 성삼위 하나님께 별다른 관심이 없는 그 내면의 상황에 대한 반증 아니겠습니까?
성도님들께서는 우리 삶의 자리에 매 순간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예수님께, 그리고 성령님께 질문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의 전환점이 시작 되어지는 부분입니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유명세의 정점에 다다르고 계셨습니다. 마가복음 1-8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공생애 시기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진리를 그 땅에 선포하셨고, 정신 질환 및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던 이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이렇게 삶의 현장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실제로 일으켜 나가시니, 그 당시 고통 받던 민중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꽃이 만발한 길 위를 걷는 듯한 상황 속, 예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 라는 지방에 속한 마을들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국경지역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게 봉헌되었던 그런 도시였습니다. 유대 문화가 담긴 분위기 그보다 훨씬 화려한 로마 제국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국경지대에 세워져 있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이 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 : 27)
제자들은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스승에 대한 평가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가 헤롯 안티파스에게 죽임당한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이라 하기도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라고 하며 스승의 질문에 답을 합니다. 그 당시 민중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를 그런 선지자 정도로 많이들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시고 다시금 제자들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그 장면은 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 : 29)
많은 이들이 선지자 정도로 여기고 있던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스승 예수를 ‘그리스도’라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의 답을 듣게 된 예수께서는, 그 답에 대한 평가나 다른 말씀 하지 않으시고, 베드로가 자신을 향해 고백한 그 발언을 비밀로 하라 말씀하십니다. 왜 비밀로 하라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그 발언이 빌립보 가이사랴 라는 지역에서 언급하기에 너무나도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위험한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지역은, 분봉왕이긴 했지만 분명 헤롯가문 출신의 왕이 번듯이 존재하고 다스리는 그런 왕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은 그 당시 신으로 여겨졌던 로마 황제에게 봉헌 된 신전이 있던 그런 기념비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헤롯도 아니고, 황제도 아닌, 예수가 진정한 왕이다!’라는 메시지가 퍼져나갔다면 아마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저 한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하늘의 보내심을 받은 것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불필요한 소요와 희생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발설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 : 31)
‘당신은 우리의 참된 왕이십니다.’ 라는, 분위기를 참 훈훈하게 하는 고백에 대한 답변으로써, ‘인자는 처참한 고난을 받고, 장로와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정죄 받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32절에 베드로의 반응이 나옵니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 : 32)
불과 몇 초 전, ‘당신은 참된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이가, 그 ‘참된 왕’ 붙들고는 ‘당신 그러면 안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왕을 붙들고 항변하는 모습 속, 절박함이 느껴지십니까? 제자들은 파트타임으로 예수를 따라다닌 것도 아니고, 부업으로 예수를 쫓아다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르고 있는 그런 이가, 머지않아 고난 받고 죽게 될 것이란 소리를 그 당사자 입에서 듣게 되었을 때, 어찌 절박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충격적인 발언에 이성을 잃고 스승을 붙들고 항변하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그것이 33절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 : 33)
베드로, 그리고 행동만 하지 않았을 뿐 베드로와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향해 뭐라고 꾸짖으십니까? ‘사탄’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사탄이라 표현된 단어는 우리말로 ‘고발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의 잘못을 꼬투리 잡아서 하나님께 고발하는, 그리하여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존재를 두고 성경은 고발자, 즉 사탄이라 칭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던질 마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는 다니고 있었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전혀 몰랐습니다. 자신이 상상하고, 스케치하고 만들어낸 상상 속 예수는 알고, 믿고, 따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모든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모든 이를 자유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그런 상태였다 라는 것이지요. 3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 : 34)
쉽게 말해서 제자들이 만든 예수 이미지 말고, 제자들이 상상하는 예수의 모습 말고, 사람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예수 형상 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드러난 있는 그대로의 예수 당신을 따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각자가 전 존재를 걸고 있는 그대로의 예수 자신을 따라오라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다양한 상황 속에서 계속 따르고자 한다면, 수많은 삶의 자리 가운데 순전하게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복잡한 인생사 속에서 흔들리지만, 비틀거리면서도 온전히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 분께 계속 질문해야 하는 것이지요. 여쭤 봐야 하는 것이지요. 끝없이 그 분과의 관계성을 구하며 여쭤봐야 하는 것이지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이 상황 속,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 속,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시대의 아픔을 직면하고 있는 이 순간,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타인이 고난을 겪고 있는 순간을 바라보는 지금, 오늘 여기에서,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갈 길 몰라 헤메이고 있는 이 순간 속,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이 질문을 예수께 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바로 이 ‘나를 따르라.’라는 것이지요. 원문을 직역해 보면 ‘내 뒤에 서라.’라는 말씀입니다. 질문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를 온전히 알 수 있으며, 예수를 온전히 알지 못한 상태로 어찌 참된 예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고서 어찌 예수 뒤에서 그 분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이건 상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요? 질문하는 이에게 말씀이라는 진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예수를 만나고, 그리고 그 계시 된 말씀을 육신 속에 녹여낼 때, 그 말씀을 살아낼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분명한 예수를 만나고, 온전히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질문의 귀결인 나를 따르라 라는 명령 앞에 우리가 온전히 설 때에, 누릴 수 있는 그 구원의 단적인 예가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됩니다. 35-3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 : 35-38)
아멘. 여전히 우리 인생의 구원자 되신 예수께 물어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시대 정신에 휩쓸려 사는 이들은, 기존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인슈타인도 말했지요.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 이다. 똑같은 방법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정신병자다. 라고 말입니다. 과거와 동일한 자세로 사는데, 무언가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이의 생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의 뜻이 우선이 아니라, 먼저 예수께 여쭙고, 예수를 알고 그를 통해, 그 분을 통해 계시된 하늘의 뜻을 따를 때,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예수를 따를 때에,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되찾게 될 것임을 제자들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사람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게 된다 하더라도, 온전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주어진 가치 누릴 줄 모르고 살아가는 그보다 더 허망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삶에 찾아오신 예수. 그분께 끊임없이 질문하셔야 합니다. 타자를 향한 진중한 질문은 서로의 관계를 풍성케 하는 것처럼, 진실로 우리게 찾아오신 예수 안에 살고 싶으시다면, 예수와 함께 동행하고 싶으시다면, 예수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예수께서 베푸시는 그 구원의 역사를 오롯이 누리고 싶으시다면, 질문하셔야 합니다.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수 많은 상황 속,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을 드릴 때, 비로소 우리 앞에서 우리 생을 이끄시며 온전하게 하시고, 주어진 가치를 있는 그대로 누릴 수 있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히브리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모세가 봤던 그 등과 동일하게 생긴 그 등 말입니다. 그 등 뒤에 섰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온전함으로 이끄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