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 사무엘상 5장 1-12절 [自存者 하나님 아버지]

19세기 말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는 10여 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하였으나 외세를 배척하는 국가정책과 유교사상과 풍토병 등으로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 네비우스(Nevius)목사님이 서울을 방문하여, 조선 선교정책의 기본 개념으로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治理) 3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이 선교정책은 한국 장로교회 선교의 기본정신이자 보편적인 선교정책이 되었고, 타 교파의 선교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自傳, 自立, 自治 그래서 우리 교단도 이 선교정신으로 미자립 교회들을 돕고는 있지만 自傳, 自立, 自治해서 <도움 받는 교회>에서 <도움을 주는 교회>가 되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독립을 해야합니다. 간난아이는 100% 돌봄이 필요합니다. 성장하면서 자립의 영역이 넓어지고 많아지다가 결혼을 하면서 독립합니다. 제가 결혼 주례할 때마다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는 것입니다. 설사 당장은 독립하지 못하더라도 소리친 만큼 빨리 독립하라는 의지를 강하게 심어주고 싶어서입니다. 독립을 해야 새로운 가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독립주의자 중의 독립자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3-4)

히브리어로 היהא רשא היהא

영어는 I am Who I am 한자로는 自存者 존재의 근원이 스스로 계시는 분,

어떤 존재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으시는 분, 절대자, 지존자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상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삼상 5:1-5)

블레셋 족속들은 이스라엘에 군대 34,000명을 무찌르고, 심지어 제사장도 죽이고, 야훼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아 와서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빼앗아 온 법궤를 자기들의 신인 다곤 신전에 전리품과 굴복의 상징으로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서 다곤 제사장들이 신전에 들어가 보니 다곤신이 땅에 얼굴을 대로 엎드려져 하나님의 법궤를 향해 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곤신의 형상은 상반신은 왕관을 쓰고 수염이 풍성한 남자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물고기 형상으로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형상입니다. 우상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설 수 없어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 엎드려져 있는 다곤을 다시 일으켜서 본래의 자리에 세웠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엎드려져 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신은 몸뚱아리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전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는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어떤 도움이나 손길이 필요한 분이 아니라 스스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자 빛이기 때문에 죽음과 우상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법궤는 상징일 뿐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예배당도, 십자가도, 성경도 상징일 뿐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생명과 빛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임마누엘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명과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임마누엘하시도록 항상 생명과 빛을 따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깨달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갔더니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삼상 5:6-10)

블레셋 사람들이 처음부터 깨달았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알지 못했기에 법궤를 빼앗아온 것입니다. 그 법궤로 인해서 다곤 신상이 매일 곤욕을 치르고, 드디어 독한 종기의 재앙까지 아스돗과 그 지역을 치자 그들 스스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삼상 5:7)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다곤신의 곤욕과 독종의 재앙이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처리할 방법을 방백들을 모아서 강구한 해결 방법은 장소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로 옮겼다가 다시 에그론으로 옮겼지만, 법궤를 옮겨 가는 성읍마다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죽음의 공포로 벌벌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로 말미암아 다곤 신상도 아스돗도 독종 재앙으로 죽을 지경임을 소문이 다 났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법궤가 가드에 오자마자 재앙이 시작되었고, 에그론으로 옮기자마자 독종재앙으로 죽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블레셋 족속들은 아직 재앙의 원인과 이유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단번에 다 죽이시지 않고 재앙으로 경고하시는 이유는 야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블레셋이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 원인과 이유를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고통의 수업료가 많아 질 뿐입니다. 빨리 깨닫고 돌아와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평강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셔야 할 곳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삼상 5:11-12)

하나님께서 창조 하실 때,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해야 할 곳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면 죽음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 수 있습니다. 물의 한계를 벗어나면 죽습니다. 호랑이는 산에서 살 수 있습니다. 물속으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나무도 각자가 살 수 있는 곳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가면 죽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산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벌거벗었음으로 알고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몰라서 숨바꼭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하와가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리고, 숨어서 살고 있느냐?

어떤 의미로 인생은 자리뺏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상을 따라 창조한 사람에게는 각자가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할 자리를 특별히 맡겼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지고 사는 사람은 그 자리의 은혜와 복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도 똑같습니다.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서 책임질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 자리를 통한 은혜와 복을 내려 줍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모든 사물들에게 정해 놓은 장소와 자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창조의 질서 속에 책임을 감당할 때 평안과 기쁨과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법궤는 법궤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의 자리에 있어야합니다. 믿음은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킴으로 그 자리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복을 받는 것입니다. 自存者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주권 아래에서 강릉교회도 여러분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책임져야 할 사역들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