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총회가 지정한 환경주일입니다. 환경을 주제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 이 현실이 개인적으로는 참 슬프고 무척이나 참담합니다. 왜 그럴까요? 환경에 대한 인식을 반강제적으로 불러일으켜야 할 만큼,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의식의 남루하다는 하나의 방증이, 바로 이 환경주일을 제정하고 지키는 이 현실 속,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환경 연구소장이며 성공회대학교 교수님이신 신익상 목사님께서, 얼마 전 환경주일과 관련하여 이런 글을 기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으로 찬란한 자연 속에 감춰진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꿀벌과 들꽃의 소멸, 북극과 남극의 해빙,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바다, 터전을 잃는 바다생물들, 그리고 점점 더 잦아지는 대규모 산불과 기후 재난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무너지는 생태계의 탄식입니다. 아마존은 불타고, 극지는 녹으며, 섬은 물에 잠기고, 곤충과 계절의 순환이 사라져갑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은 사실 붕괴 직전의 생태계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위태로운 균형 위에 놓인 것입니다.
이 시적 산문은 피조세계의 붕괴 현실을 생생히 드러내며, 많은 이들이 그 실태를 알고는 있지만 정작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드물다고 말합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한지 되묻습니다. 플라스틱 컵, 자동차의 탄소 배출, 무분별한 쓰레기, 재활용 무시, 녹아내리는 동토층, 무심한 냉난방 사용 등…
작은 행동 하나에도 생태계에 대한 고민과 책임의식이 필요한데, 과연 우리는 그러한 마음과 결단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시거나, ‘그런게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한번 깊게 성찰해 보셔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성찰 없이, 영생을 바라시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이런 고민 없이 사시는 분은, 자신이 자가당착적 신앙을 하고 있는 것과, 바울이 그토록 극혐했던 영지주의의 명맥을 잇는, 왜곡된 신앙을 후대에 전수하고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과 관련된 생각을 가벼이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영지주의자로 몰아가고, 그의 영생과 신앙까지 들먹이며 성찰을 강요할 필요가 있습니까?’ 네. 필요 있습니다.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연환경에 대해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제 자체가 모순이며, 자신의 신앙을 그 모순 위에서 반복해 나가는 이들에겐, 영생과 구원은 영원히 요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생과 구원을 위해 예수 믿는 것 아니십니까? 그런데, 성서를 들춰보면,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이나 고뇌 없이 사는 이가, 영생과 구원과 가까울 수 없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무너져만 가는 이 피조세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그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 창세기1:31-2:1절을 합독하겠습니다.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이 말씀에 비춰볼 때, 무너져가는 피조세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법적으로는 각 땅의 주인이 다를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피조세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땅을 소유한 이들은, 본질적으로 청지기일뿐, 땅의 궁극적인 주인이 아닌 것이, 바로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자기 소유의 땅을 둘러메고 가지 못하는 그 사실을 통해 확인됩니다.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사는 땅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는, 곧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이 세계를 ‘아버지의 세계’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는 인간의 무분별한 배출과 탐욕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포악한 행태로 인해 아버지의 창조가 불도저와 롤러에 짓밟히고, 검은 연기로 뒤덮인 채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세계가 파괴되는 현실을 보면서도,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는 찬양을 아무렇지 않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소리는 사라지고 기계 소리만 커지는 가운데, 교리만 고백하고 평안만 노래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라면, 쓰레기와 매연, 오염수와 담배꽁초가 가득한 이 현실을 모른 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환경 문제를 외면하며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지으신 세계에 무관심하다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의 세계가 파괴되는 데 무감하다면, 하나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분노하신 공통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거나 하나님의 피조물이 억압·모독당할 때였습니다. 이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세계가 훼손될 때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계셨던 당시, 로마 제국처럼 무력과 지배로 피조세계를 망가뜨린 자들을 향해 분노하셨듯,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계시다면 물질과 성장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현실을 향해 분노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께서 만드신 피조세계가 병들어 가는 현실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그 심각함을 외면하고 묵인하며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세계가 무너지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무관심한 사람은 아버지와 진정한 교류가 없는 사람이며, 그런 이는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고, 결국 구원과 영생도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에 무관심한 이는 하나님과 진정한 교감이 없는 무책임한 존재이며, 결국 구원과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환경 문제를 신앙과 분리할 수 없으며, 피조세계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자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 피조세계의 안위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아버지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합독하겠습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형상대로 지으시고 자녀로 삼으신 주된 목적은, 우리 생명을 풍성하게 하여 그 풍성함이 이 땅에도 퍼져 모든 피조세계가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도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복 받은 자가 다른 이에게 복을 나누어 선순환시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복은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 복을 받은 자를 통해 주변과 세상에 전달되어 확장됩니다.
영만 중시하는 왜곡된 영지주의 신학과 변질된 복 신학이 퍼지면서, 권력과 욕망을 채우려는 목사와 그런 복만 탐하는 성도들이 복의 본질을 망가뜨렸습니다. 복은 결코 개인의 안위나 권력 유지가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신 복은 피조세계를 이롭게 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복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지구의 위기와 생태 파괴를 외면하고, 책임 없이 자기만족에 빠진 채 무심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명령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풍성해지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삶이 망가질 것이라 경고합니다. 지금의 환경 위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며, 이는 신앙 부정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늘 헤아리며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에 걸맞는 삶을 지향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우리도 이런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변이 너무 무책임해서 효과 없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결과를 계산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에 따라 옳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피조세계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에 공명되어, 작은 것 하나부터 실천하는 그 삶을 통해, 이땅에 복이 유통될 겁니다. 이렇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피조세계를 온전케 할 사람들이, 세상의 우세종으로 서게 하실 그 날을 기대합니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죽기 직전엔 그 아름다운 상황을 마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할 듯 하지만, 그래도 저는 힘이 닿는 대로 피조세계를 아끼며 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말입니다. 성도님들은 이제 이 피조세계를 어찌 대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이 고민을 품는 구원의 시작이 우리 강릉식구들의 삶에 피어나길 빕니다.
오늘은 총회가 지정한 환경주일입니다. 환경을 주제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 이 현실이 개인적으로는 참 슬프고 무척이나 참담합니다. 왜 그럴까요? 환경에 대한 인식을 반강제적으로 불러일으켜야 할 만큼,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의식의 남루하다는 하나의 방증이, 바로 이 환경주일을 제정하고 지키는 이 현실 속,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환경 연구소장이며 성공회대학교 교수님이신 신익상 목사님께서, 얼마 전 환경주일과 관련하여 이런 글을 기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으로 찬란한 자연 속에 감춰진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꿀벌과 들꽃의 소멸, 북극과 남극의 해빙,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바다, 터전을 잃는 바다생물들, 그리고 점점 더 잦아지는 대규모 산불과 기후 재난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무너지는 생태계의 탄식입니다. 아마존은 불타고, 극지는 녹으며, 섬은 물에 잠기고, 곤충과 계절의 순환이 사라져갑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은 사실 붕괴 직전의 생태계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위태로운 균형 위에 놓인 것입니다.
이 시적 산문은 피조세계의 붕괴 현실을 생생히 드러내며, 많은 이들이 그 실태를 알고는 있지만 정작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드물다고 말합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한지 되묻습니다. 플라스틱 컵, 자동차의 탄소 배출, 무분별한 쓰레기, 재활용 무시, 녹아내리는 동토층, 무심한 냉난방 사용 등…
작은 행동 하나에도 생태계에 대한 고민과 책임의식이 필요한데, 과연 우리는 그러한 마음과 결단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시거나, ‘그런게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한번 깊게 성찰해 보셔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성찰 없이, 영생을 바라시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이런 고민 없이 사시는 분은, 자신이 자가당착적 신앙을 하고 있는 것과, 바울이 그토록 극혐했던 영지주의의 명맥을 잇는, 왜곡된 신앙을 후대에 전수하고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과 관련된 생각을 가벼이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영지주의자로 몰아가고, 그의 영생과 신앙까지 들먹이며 성찰을 강요할 필요가 있습니까?’ 네. 필요 있습니다.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연환경에 대해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제 자체가 모순이며, 자신의 신앙을 그 모순 위에서 반복해 나가는 이들에겐, 영생과 구원은 영원히 요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생과 구원을 위해 예수 믿는 것 아니십니까? 그런데, 성서를 들춰보면,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이나 고뇌 없이 사는 이가, 영생과 구원과 가까울 수 없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무너져만 가는 이 피조세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그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 창세기1:31-2:1절을 합독하겠습니다.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이 말씀에 비춰볼 때, 무너져가는 피조세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법적으로는 각 땅의 주인이 다를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피조세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땅을 소유한 이들은, 본질적으로 청지기일뿐, 땅의 궁극적인 주인이 아닌 것이, 바로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자기 소유의 땅을 둘러메고 가지 못하는 그 사실을 통해 확인됩니다.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사는 땅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는, 곧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이 세계를 ‘아버지의 세계’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는 인간의 무분별한 배출과 탐욕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포악한 행태로 인해 아버지의 창조가 불도저와 롤러에 짓밟히고, 검은 연기로 뒤덮인 채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세계가 파괴되는 현실을 보면서도,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는 찬양을 아무렇지 않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소리는 사라지고 기계 소리만 커지는 가운데, 교리만 고백하고 평안만 노래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라면, 쓰레기와 매연, 오염수와 담배꽁초가 가득한 이 현실을 모른 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환경 문제를 외면하며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지으신 세계에 무관심하다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의 세계가 파괴되는 데 무감하다면, 하나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분노하신 공통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거나 하나님의 피조물이 억압·모독당할 때였습니다. 이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세계가 훼손될 때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계셨던 당시, 로마 제국처럼 무력과 지배로 피조세계를 망가뜨린 자들을 향해 분노하셨듯,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계시다면 물질과 성장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현실을 향해 분노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께서 만드신 피조세계가 병들어 가는 현실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그 심각함을 외면하고 묵인하며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세계가 무너지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무관심한 사람은 아버지와 진정한 교류가 없는 사람이며, 그런 이는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고, 결국 구원과 영생도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에 무관심한 이는 하나님과 진정한 교감이 없는 무책임한 존재이며, 결국 구원과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환경 문제를 신앙과 분리할 수 없으며, 피조세계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자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 피조세계의 안위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아버지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합독하겠습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형상대로 지으시고 자녀로 삼으신 주된 목적은, 우리 생명을 풍성하게 하여 그 풍성함이 이 땅에도 퍼져 모든 피조세계가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도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복 받은 자가 다른 이에게 복을 나누어 선순환시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복은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 복을 받은 자를 통해 주변과 세상에 전달되어 확장됩니다.
영만 중시하는 왜곡된 영지주의 신학과 변질된 복 신학이 퍼지면서, 권력과 욕망을 채우려는 목사와 그런 복만 탐하는 성도들이 복의 본질을 망가뜨렸습니다. 복은 결코 개인의 안위나 권력 유지가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신 복은 피조세계를 이롭게 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복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지구의 위기와 생태 파괴를 외면하고, 책임 없이 자기만족에 빠진 채 무심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명령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풍성해지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삶이 망가질 것이라 경고합니다. 지금의 환경 위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며, 이는 신앙 부정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늘 헤아리며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에 걸맞는 삶을 지향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우리도 이런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변이 너무 무책임해서 효과 없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결과를 계산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에 따라 옳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피조세계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에 공명되어, 작은 것 하나부터 실천하는 그 삶을 통해, 이땅에 복이 유통될 겁니다. 이렇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피조세계를 온전케 할 사람들이, 세상의 우세종으로 서게 하실 그 날을 기대합니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죽기 직전엔 그 아름다운 상황을 마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할 듯 하지만, 그래도 저는 힘이 닿는 대로 피조세계를 아끼며 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말입니다. 성도님들은 이제 이 피조세계를 어찌 대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이 고민을 품는 구원의 시작이 우리 강릉식구들의 삶에 피어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