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6 요한복음 4장 5-14절 [목마름 전혀 없으리] - 유병진 목사

오늘 본문에 한 여인 등장합니다. 인생 자체가 결핍투성이입니다. 즉 ‘목마름으로 가득한 인생이었다.’ 라는 것이지요.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입니다. 과거,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그곳에 자국민들을 정착시켜 혼혈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 민족들과 이방인들은 피가 섞이게 되었고, 그런 북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남유다 사람들은 ‘민족적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 라는 이유로, 그들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녀는 이런 ‘출신의 결핍’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

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우물로 간 시간은 여섯 시입니다. 우리 시간으로 정오 때입니다. 땡볕이 내리쬐는 시간이라 사람들이 보통 

활동하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이 바깥 활동을 피하는 그 더운 시간에 그곳에 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타인과 마주

하기를 꺼려하는, 그런 ‘관계적 결핍’ 속에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곱의 우물’이라는 기념비

적인 공간에서, 타인에게 순수하게 물 한잔 건넬 수 없는, 넉넉함이 결핍되어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을 뛰어

넘어서는 전혀 생각할 줄 모르는, 현실에만 사로잡혀 이상의 결핍, 꿈의 결핍에 처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지독하게도 

생생한 현실 가운데, 목마름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고 수동적 인생 살고 있었던, 근본적 목마름에 절어 있었던 그런 존재였습니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녀는 자신이 그런 절대적 목마름의 상태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던, 진실로 그 어떤 

소망도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결핍으로 가득한 인생 앞으로, 생의 목마름을 근원적으로 해갈해 주시는 예수께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먼저

뭐라 말씀하십니까? ‘물을 달라.’ 하십니다. ‘상종’ 당하지 못하는, 뿌리가 같은 동족에게까지 비천하게 여김 받는 사마리아인에게

다가가, ‘부탁’으로 ‘접촉’하시는 것이지요. 즉, 그녀가 가지고 있는 출신의 결핍을 해소시켜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다니지 않는, 정오라는 시간 속, 함께하는 이 하나 없던 그녀와 함께하시며 여인이 가지고 있던 관계적 결핍을 해갈하십

니다. 또한 순수하게 물 한잔 대접할 줄 모른 채 살아가는 여백 없는 인생에게, 물을 주겠다 하시며, 그 넉넉함의 결핍을 따스히 

채워주시고, 결핍 가득한 현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꿈꾸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에게, ‘목마름 없는 인생’이라는 꿈을 꿀 수 있도록,

그 꿈의 결핍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결핍으로 인해 텅 비어 말라버린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의 겉부터, 그녀의 깊은 내면까지, 

전 존재의 결핍을 채워주셨던 것이지요.

 

즉,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다가가셨을 때, 그녀의 결핍은 하나하나 해갈되었고, 결국, 이 여인이 경험한 해갈의 역사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물의 효험’이 드러난 것입니다. 즉,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말씀하는 ‘물’은 모든 존재를 온전케 하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자 뜻을 가리키는 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속, 이 ‘물’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 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7장에서는 ‘물’을 ‘성령’으로 표현합니다. 이 7장의 표현을

통해 4장의 ‘물’을 이해할 때, 4장의 물이 뜻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자 뜻이라는 사실이 더 명확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같은 뜻, 같은 마음, 같은 지향으로 사역하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 성령님의 뜻이고, 성령님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자 뜻을 마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속, 우리 말 ‘마신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피노’입니다. 이 ‘피노’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8,11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4:11)

 

오늘 본문 속, ‘마신다’ 라는 단어와, 우리가 합독한 ‘마신다’는 헬라어 ‘피노’라는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피노’의 본뜻은 ‘흡수하다.’입니다. 즉,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라는 이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정신을 흡수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정신을 흡수하면 어떻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까요? 이것은 창세기 2장의 말씀을 빗대어서 

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요한복음 2:10-14)

 

이 창세기 2장의 말씀은, 고대근동지역에 위치한 4대 강의 기원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입니다. 비손강, 기혼강, 힛데겔강, 

유브라데강, 이 4대 강의 원천은 어디입니까? 에덴입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손수 가꾸신 생명동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로 고대

근동지역의 큰 강들의 근원이었다라는 것이지요. 이 원천은 결코 마르지 않고 흘러서 온 땅에 생기를 공급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물이 바로 이런 인생의 ‘원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을 끊임없이 마시고 마셔도, 여전히 해갈되지 

않는, 끝없는 욕구불만의 인생으로 인해 욕망의 노예 된 채 살아가던 이가, 예수의 뜻과 정신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더 이상, 

단순히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것에 자신의 목을 매지 않습니다. 욕구에 중독되거나 욕망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살기 위해 

먹지, 먹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욕구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다스리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화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머금은 자신의 고귀함을 

알아, 원초적 욕구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았습니다. 순간의 욕망에 하늘 아버지의 형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결핍 

가운데에서도 당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결핍투성이인 이 땅 가운데, 모든 생의 갈급함을 해갈하는 하늘의 

생명수를 공생애를 통해 흘려보내실 수 있었던 것 아니었겠습니까?

 

예수께서 주시는 그 물을 마심으로써 하늘의 뜻과 마음을 흡수한 사람, 하늘의 통치 받기를 결단한 이는,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서 

해방됩니다. 자신의 결핍에 중독되어 있던 이가, 스스로의 욕구만을 욕망하던 이가, 끝없이 자신만을 향하던 이가, 결국 스스로의 

노예가 되어버려 끝없이 안으로만 말려 들어가던 자폐적 인생 살던 이가, 이제 그 물의 흐름 따라 역방향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구세주의 뜻과 마음 담긴 샘물이, 마신 이의 속에서 솟기 시작합니다. 그 물과 그의 인생은, 넘쳐흘러 바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

합니다. 자아를 흘러넘친 그 물과 그 인생은, 그가 마주하는 타자와, 피조세계 곳곳에 흘러 흘러갑니다.

 

그는 이제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자로서 생을 꾸려나갑니다. 작은 것 하나에서도 생명의 박동을 듣기 시작

합니다. 그래서 그는 메마른 자신에게 흘러온 물처럼, 메마른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메마른 이들의 구원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메말라버린 피조세계의 회복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메말라버린 생명이 다시 생기를 찾게 하는 

역사를 위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에 의해 기뻐하지 않고, 타자의 구원을 보고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피조세계를 더 소비

하지 못해 아등바등하는 이가 아니라, 피조세계의 회복을 보고 참 기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는 욕구에 잠식된, 자기 생명 연장

하는 것에 혈안이 된 이가 아니라,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에 집중하고 동참하고 감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먹은 사람은, 예수의 뜻과 정신을 흡수한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들어 사는 사람은, 그래서 생명에 잇댄 사람은, 생명을 

향하는 그 사람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습니다. 생의 근원, 생의 본질과 이어져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목마른 이유는, 다름없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지도 않고, 예수의 뜻과 정신을 흡수하지 않으며, 

하늘의 통치를 따르지 않은 채 살기에, 고로 그 통치를 흘려보낼 수도 없기에 우리는 목마릅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채, 결핍에 

허우적거리며 삽니다. 바깥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면 밖을 향해 살아야지, 언제까지 욕구에 허덕이는 내면에, 근원 없는 스스로

에게 중독된 채 썩어 있는 안을 향해서만 사실 겁니까? 언제까지 자기만족적 신앙에 흐믓해 하실 겁니까? 언제까지 겉만 핥음

으로는 누릴 수 없는 궁극적 구원을 이루고 얻고자 하십니까? 은혜는 밖에서 왔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끊임없이 밖을 향해, 

끊임없이 타자를 향해 흐르며 사셨습니다. 그 은혜를 받은 이라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이라면 밖을 향해야 합니다. 그러라고 

우리에게 은혜 베푸셨습니다. 시간을 뚫고 독생자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라고 성령 하나님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주시는 그 물, 들이키십시오. 예수의 그 뜻과 정신 들이키십시오. 

하나님의 통치를 있는 그대로 들이키십시오. 죽음 앞에서도, 주어진 잔을 피하지 않으신 예수처럼 받아 

들이키십시오. 


들이켜진 그 물은 우리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메마른 우리 인생을 축이고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은 세상의 

메마른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가장자리로 흘러 흘러 갈 것입니다. 그 물의 움직임에 인생을 실어 내십시오. 그렇게 이 샘물따라 

살아갈 때, 이 땅을 향한 하늘의 일하심에 동참할 때, 목마름을 넘어서서 참된 생의 충만함을 경험케 될 것입니다. 그 샘물 따라 

살 때만이 목마름 전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밖에서 왔고, 밖에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