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30. 시 68:19 [찬송할지로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표현이 33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말씀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우리의 삶 가운데 전반기를 마무리하며 새로운 후반기를 시작하게 되는 6월의 마지막 주일, 짧은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삶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참된 구원의 감격과 감사 가운데 진정한 찬송을 회복하며 살아가는 강릉 가족들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찬송할지로다>

오늘 본문 시편 68편 19절은 찬송할지로다 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찬송할지로다. 이 말씀뿐 만이 아닙니다. 서두에 함께 읽어보았던 말씀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면서 찬송하며 기쁨을 잊지 않는 삶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시편 33편 1절 말씀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가 찬송임을 기억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아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운동해야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년 초에 세운 계획처럼 일 년 동안 꾸준히 운동하며 살아가시는 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건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도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 더 맛있게 보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일 년 동안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지 다짐하지만, 역시나 우리는 드라마를 보고, 영화의 내용을 곱씹어 묵상하며, 말씀보다 핸드폰에 더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일 때가 더 많습니다.

하물며 감사하며 찬송하는 삶은 어떻겠습니까? 참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모습을 찬송할지로다 앞의 본문을 통해서 일깨워 주시고 계십니다. 바로 찬송할 이유를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68:19).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구원이 되시기에, 그것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찬송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찬송의 이유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 속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의 삶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무엇이 있습니까? 특별히 지난 6개월을 돌아보면서 가장 기쁘고 감사했던 시간이 언제였는지 한 번 돌아보시겠습니까? 혹시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으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그런데 구원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실 때 어떻습니까? 구원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구원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런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기억하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신 사건, 바로 그것이 구원입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일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찬송시를 썼던 패니 제인 크로스비 여사는 찬송가 255장 3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하시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하시네 불쌍한 사람들아 오라 하시네 너희 죄 사해주사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하시네 기억 아니하시네.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자격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용서함을 받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삶의 감격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또한 찬송하기에 마땅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사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것만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갈 이유가 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오늘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68:19).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이 바로 구원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그 짐을 날마다 대신 져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만 할 짐은 날마다 무겁습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예수님도 마태복음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오늘의 본문과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은 다 내게로 오라 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이기까지 하십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갔던 사람이 누굴까? 하고 생각해본다면 저는 단연코 모세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한 자리에서 20년, 30년 동안 같은 일을 하면서 지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유일무이한 지도자로써 살았습니다. 한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 한 가지의 일이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장정만 6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지도자로써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도 참 중요합니다. 자발적인 마음과 생각으로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면 그 일은 참 즐겁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종의 의식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대상으로 지도력을 펼쳐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지파 중에 가장 유능하고 신실한 사람들을 불러서 가나안 땅을 정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 10명은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모세는 민수기 11장 11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탄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그리고 15절을 보면 이렇게까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베푸실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즉시 나를 죽여서 내가 고난당함을 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라고 고백할 만큼 모세는 괴롭고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그냥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마다 모세를 책망하지도, 모세를 심판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피할 길을 내사 모세로 하여금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런 모세가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백성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장 31절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1:31).

그렇게 괴롭고 힘든 시간, 하나님은 모세 멀리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는 주님과 함께 해변가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하늘 저편에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든 여정들이 영화처럼 생생히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각각의 장면에는 모래 위에 새겨진 두 줄의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주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걸어왔던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 때 쯤 그는 문득 길 위에 있는 발자국들이 어떤 때는 단지 한 줄 밖에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것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힘든 시기마다 그랬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걸려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가 일단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다면 언제나 저와 함께 걸어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뒤돌아 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발자국이 한 줄 밖에 없었습니다. 전 도무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당신은 정작 필요할 때면 나를 버려야 했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한 자여,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결코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네가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 마다 발자국이 한 줄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 마다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 때문이니라."


강릉가족 여러분. 2019년을 시작하고 6개월의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혹시 우리의 삶에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날마다 대신 져 주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셨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안으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셨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잊은채 살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로욜라의 성 이그나티우스라는 분은 삶을 주목하기 위해 매일 성찰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묵상하는 것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돌아보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사건을 두고 기도하고, 의도적으로 내일을 내다보면, 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새로운 6개월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기쁨, 믿음의 눈이 회복되어지는 강릉 가족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며,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돌아보며,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 때 남은 한 해도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를 안으시는 하나님과 함께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