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네 가지 경고로써 마무리를 지으십니다. 역사의 마지막 심판 때에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생들을 구원과 심판으로 구분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13-14절의 두길 = 넒은 길과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은 쉽기 때문에 찾는 이들이 많지만 종착역에 도착해서 보면 멸망의 길입니다. 좁은 길은 힘들고 어려워서 찾는 사람도 적지만 구원과 생명의 길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 본문 두 종류의 나무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두 주장입니다. <주여 주여~> 말로만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삶 속에서 실천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는 선지자 노릇한 것은 무효입니다. 내 인생에 유익하든지, 무익하든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산 것만이 유효합니다.
네 번째는 두 건축자입니다. 모래위에 세운 집은 태풍이 불어오면 기초가 연약해서 무너져 버리고, 반석 곧 믿음 위에 세운 믿음의 집은 기초가 튼튼해서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어떤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건재할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역사의 종말의 심판의 확실성을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어디를 향해서 살아야 하는지? 믿음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선명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혼란스러운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사람의 겉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식사 기도를 하는 것이나, 성경책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십자가 목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나, 자동차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 등으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독실한지? 독실하지 않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십자가 장식이나 신앙행위를 하지 않을 때에는 신앙인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무는 그 나무에 열리는 열매로 구분할 수 있듯이 믿음도 믿음의 열매로 누구든지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누가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믿음의 열매를 보면 누구든지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와 열매는 일치합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6)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했으니까 열매만 좋으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습니다. 속이야 어떻든 겉만 번지르르 하면 되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7-18)
열매가 곧 나무의 이름입니다. 포도가 맺히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가시나무, 엉겅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자연법칙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교회가 교회 노릇하는 것은 예수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무효입니다. 목사 노릇하는 것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성도도 노릇한 것은 전부 무효입니다. 어떤 박해와 핍박에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믿음의 집은 말씀따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유효합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예수님도 십자가와 부활로 사랑과 영생의 구원을 증명하셨습니다. 열매로 이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그리스도인으로써 열매로 자신과 직분과 믿음을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미혹되지 않도록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꼭 열매로 확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직분>과 생활을 일치시킵시다.
본성은 언젠가 드러나게 됩니다. 잘 훈련된 동물들도 통제가 풀리는 날에는 동물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더러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점잖게 하려고 애를 써도 어느 순간에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더러운 것이 튀어나오고 맙니다. 의지와 교양과 도덕으로 잠시 억제하고 있다가 언젠가는 속에 들어있는 생각과 가치관을 드러냅니다. 반대로 선한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을 품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말과 행동도 결과도 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8)
잠시 동안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잎 피고, 꽃피고, 열매가 맺히면 만천하에 무슨 나무인지 드러납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은 모방할 수 있어도 속내는 모방할 수 없습니다.
교회 출석하고,예배드리고,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으로 기쁨과 감사, 평안은 결코 모방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기쁨으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흉내 낼 수 있어도 진정으로 감사드리는 것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시종여일해야 합니다. 단지 주일은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른 요일은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교리는 생활이요, 신앙은 실천입니다. 생활에 말씀이 나타나지 않으면 노릇하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로 거듭나셔서 열매로 보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으면 땔감됩니다.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입니까? 어떤 나무를 나쁜 나무라고 말합니까? 일반적으로 나쁜 나무는 생명력이 왕성해서 쉽게 죽지도 않고 번식도 잘 합니다. 나쁜 열매도 보기에 화려해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맛있을 것같습니다. 하지만 독이 들어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잘 자라지도 않고, 조금만 부주의하면 병들고 죽습니다. 열매도 풍성하게 맺히지도 않고 때로는 볼품도 없습니다.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 & 못된 나무와 나쁜 열매의 차이와 기준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느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느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은 예수님께 접붙임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만해 지고 싶어도 교만해 질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영광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영광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구원을 허락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복을 줄수 없지만 복을 받고 주는 자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그리스도인이란 그 뿌리가 하나님께 닿아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나무가 되었는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고 아직도 나쁜 열매를 맺고 있으면 찍어 불어 던져 넣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일을 이루실 때까지 합니다. 영원합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누가 못된 짓 다하고 교회만 다니면 천국 간다고선전합니까? 거짓선지자입니다. 노릇하다가 천국가면 꽝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십자가를 지고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충성하고, 헌신하고, 순종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많이 열려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땔감되지 마시고 믿음의 나무 잘 가꾸셔서 열매가 풍성한 좋은 믿음의 나무들이 되시길 주님의이름으로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네 가지 경고로써 마무리를 지으십니다. 역사의 마지막 심판 때에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생들을 구원과 심판으로 구분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13-14절의 두길 = 넒은 길과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은 쉽기 때문에 찾는 이들이 많지만 종착역에 도착해서 보면 멸망의 길입니다. 좁은 길은 힘들고 어려워서 찾는 사람도 적지만 구원과 생명의 길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 본문 두 종류의 나무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두 주장입니다. <주여 주여~> 말로만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삶 속에서 실천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는 선지자 노릇한 것은 무효입니다. 내 인생에 유익하든지, 무익하든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산 것만이 유효합니다.
네 번째는 두 건축자입니다. 모래위에 세운 집은 태풍이 불어오면 기초가 연약해서 무너져 버리고, 반석 곧 믿음 위에 세운 믿음의 집은 기초가 튼튼해서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어떤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건재할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역사의 종말의 심판의 확실성을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어디를 향해서 살아야 하는지? 믿음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선명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혼란스러운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사람의 겉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식사 기도를 하는 것이나, 성경책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십자가 목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나, 자동차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 등으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독실한지? 독실하지 않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십자가 장식이나 신앙행위를 하지 않을 때에는 신앙인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무는 그 나무에 열리는 열매로 구분할 수 있듯이 믿음도 믿음의 열매로 누구든지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누가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믿음의 열매를 보면 누구든지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와 열매는 일치합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6)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했으니까 열매만 좋으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습니다. 속이야 어떻든 겉만 번지르르 하면 되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7-18)
열매가 곧 나무의 이름입니다. 포도가 맺히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가시나무, 엉겅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자연법칙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교회가 교회 노릇하는 것은 예수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무효입니다. 목사 노릇하는 것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성도도 노릇한 것은 전부 무효입니다. 어떤 박해와 핍박에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믿음의 집은 말씀따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유효합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예수님도 십자가와 부활로 사랑과 영생의 구원을 증명하셨습니다. 열매로 이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그리스도인으로써 열매로 자신과 직분과 믿음을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미혹되지 않도록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꼭 열매로 확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직분>과 생활을 일치시킵시다.
본성은 언젠가 드러나게 됩니다. 잘 훈련된 동물들도 통제가 풀리는 날에는 동물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더러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점잖게 하려고 애를 써도 어느 순간에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더러운 것이 튀어나오고 맙니다. 의지와 교양과 도덕으로 잠시 억제하고 있다가 언젠가는 속에 들어있는 생각과 가치관을 드러냅니다. 반대로 선한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을 품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말과 행동도 결과도 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8)
잠시 동안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잎 피고, 꽃피고, 열매가 맺히면 만천하에 무슨 나무인지 드러납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은 모방할 수 있어도 속내는 모방할 수 없습니다.
교회 출석하고,예배드리고,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으로 기쁨과 감사, 평안은 결코 모방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기쁨으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흉내 낼 수 있어도 진정으로 감사드리는 것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시종여일해야 합니다. 단지 주일은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른 요일은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교리는 생활이요, 신앙은 실천입니다. 생활에 말씀이 나타나지 않으면 노릇하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로 거듭나셔서 열매로 보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으면 땔감됩니다.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입니까? 어떤 나무를 나쁜 나무라고 말합니까? 일반적으로 나쁜 나무는 생명력이 왕성해서 쉽게 죽지도 않고 번식도 잘 합니다. 나쁜 열매도 보기에 화려해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맛있을 것같습니다. 하지만 독이 들어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잘 자라지도 않고, 조금만 부주의하면 병들고 죽습니다. 열매도 풍성하게 맺히지도 않고 때로는 볼품도 없습니다.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 & 못된 나무와 나쁜 열매의 차이와 기준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느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느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은 예수님께 접붙임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만해 지고 싶어도 교만해 질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영광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영광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구원을 허락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복을 줄수 없지만 복을 받고 주는 자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그리스도인이란 그 뿌리가 하나님께 닿아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나무가 되었는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고 아직도 나쁜 열매를 맺고 있으면 찍어 불어 던져 넣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일을 이루실 때까지 합니다. 영원합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누가 못된 짓 다하고 교회만 다니면 천국 간다고선전합니까? 거짓선지자입니다. 노릇하다가 천국가면 꽝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십자가를 지고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충성하고, 헌신하고, 순종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많이 열려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땔감되지 마시고 믿음의 나무 잘 가꾸셔서 열매가 풍성한 좋은 믿음의 나무들이 되시길 주님의이름으로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