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강릉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임을 확신합니까?
여러분은 강릉교회를 귀하게 여기십니까?
여러분은 강릉교회 모든 식구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임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강릉교회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십니까?
저는 강릉교회 위임목사로써 정말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며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느끼시는 분도 계시고, 느끼지 못하시는 분도 계실겁니다. 제가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는지? 귀하게 여기지 않는지? 는 여러분이 다 알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저를 귀하게 여기는지? 여기지 않는지? 저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우리가 우리를 서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강릉교회는 애굽이요, 세상입니다. 이름만 교회이지 실상은 애굽입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이 경쟁상대입니다. 형제자매도 경쟁상대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기보다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나아갑니다.
강릉교회는 64년 전 믿음의 부모님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개척된 교회입니다. 강릉교회는 64년 동안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충성, 헌신, 순종으로 섬기는 여러분의 땀과 눈물과 시간과 물질의 헌신으로 계속해서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소문에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소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선지자 엘리야, 예레미야가 아닐까? 온갖 설이 사람마다 고을마다 달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도 베드로께서 성품대로 큰 소리로 시원 시원하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나님께서 이 신앙고백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시는 줄 믿습니다. 강릉교회도 64년 전에 이 신앙고백위에 창립된 줄 믿습니다. 지금도 이 신앙고백위에 부흥하고 성장하는 줄 믿습니다.
강릉 가족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신앙고백 위에 강릉교회를 세우시고, 오늘까지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충성, 헌신, 순종하셨기에 놀라운 부흥과 성장으로 누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64년을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왔듯이 우리 모두도 이제 70주년, 100주년을 바라보고 변함없이 충성, 헌신,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P.Sartre)는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뛰어난 문학가로서 많은 문학 작품도 남겼습니다. 그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답게 기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종교적 가르침 없이도 충분히 선하게 살 수 있기에, 천국과 지옥은 허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사르트르는 노년에 폐수종이라는 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웠습니다. 의사는 프랑스의 자랑인 대철학자가 품위 있게 죽어라고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르트르는 의사에게 온갖 욕을 다 하면서 병원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사르트르의 이런 발악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병원 측은 인생의 철학을 정립한 노학자가 당당하게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보통 사람들보다 더 죽음을 거부하고 반항하고 행패를 부리면서 두려워하는 모습에 당황했고, 황당했습니다. 그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족이외에는 면회를 제한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사르트르는 죽었고,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주창하는 실존주의 대철학자가 모든 사람들이 다 맞는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하며 몸부림치며 죽음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 절망했습니다. 프랑스의 한 신문기자는 그의 모습을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는 진리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그로 하여금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게 했다고 기사를 썼습니다.
이처럼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은 공포입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의 천국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릉시민들은 프랑스 실존주의 대철학자 사르트르와 똑같이 지금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세상의 온갖 지식과 부귀영화와 권력으로 으스대면서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큰 소리 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죽음에 직면하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떨면서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잠깐이라도 더 살기위해 발버둥 칠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 갇혀있는 강릉시민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줘야합니다.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는 곳은 강릉교회뿐입니다. 강릉시민들에게 천국의 소망의 복음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강릉시민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 하면 우리 책임입니다.
강릉시민들을 위해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64년 전에 강릉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눈물과 땀과 시간과 물질로 생명으로 충성, 헌신,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강릉 시민들의 구원을 위해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드로 사도에게 주셨던 복과 권세를 허락해주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7-19)
그렇게 강릉교회를 통해 수많은 강릉 시민들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가 참으로 복된 교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천국 열쇠를 받아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 하늘에서 풀리는 교회, 강릉시민들의 진정한 소망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강릉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임을 확신합니까?
여러분은 강릉교회를 귀하게 여기십니까?
여러분은 강릉교회 모든 식구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임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강릉교회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십니까?
저는 강릉교회 위임목사로써 정말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며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느끼시는 분도 계시고, 느끼지 못하시는 분도 계실겁니다. 제가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는지? 귀하게 여기지 않는지? 는 여러분이 다 알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저를 귀하게 여기는지? 여기지 않는지? 저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우리가 우리를 서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강릉교회는 애굽이요, 세상입니다. 이름만 교회이지 실상은 애굽입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이 경쟁상대입니다. 형제자매도 경쟁상대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기보다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나아갑니다.
강릉교회는 64년 전 믿음의 부모님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개척된 교회입니다. 강릉교회는 64년 동안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충성, 헌신, 순종으로 섬기는 여러분의 땀과 눈물과 시간과 물질의 헌신으로 계속해서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소문에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소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선지자 엘리야, 예레미야가 아닐까? 온갖 설이 사람마다 고을마다 달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도 베드로께서 성품대로 큰 소리로 시원 시원하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나님께서 이 신앙고백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시는 줄 믿습니다. 강릉교회도 64년 전에 이 신앙고백위에 창립된 줄 믿습니다. 지금도 이 신앙고백위에 부흥하고 성장하는 줄 믿습니다.
강릉 가족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신앙고백 위에 강릉교회를 세우시고, 오늘까지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충성, 헌신, 순종하셨기에 놀라운 부흥과 성장으로 누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64년을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왔듯이 우리 모두도 이제 70주년, 100주년을 바라보고 변함없이 충성, 헌신,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P.Sartre)는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뛰어난 문학가로서 많은 문학 작품도 남겼습니다. 그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답게 기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종교적 가르침 없이도 충분히 선하게 살 수 있기에, 천국과 지옥은 허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사르트르는 노년에 폐수종이라는 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웠습니다. 의사는 프랑스의 자랑인 대철학자가 품위 있게 죽어라고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르트르는 의사에게 온갖 욕을 다 하면서 병원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사르트르의 이런 발악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병원 측은 인생의 철학을 정립한 노학자가 당당하게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보통 사람들보다 더 죽음을 거부하고 반항하고 행패를 부리면서 두려워하는 모습에 당황했고, 황당했습니다. 그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족이외에는 면회를 제한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사르트르는 죽었고,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주창하는 실존주의 대철학자가 모든 사람들이 다 맞는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하며 몸부림치며 죽음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 절망했습니다. 프랑스의 한 신문기자는 그의 모습을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는 진리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그로 하여금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게 했다고 기사를 썼습니다.
이처럼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은 공포입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의 천국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릉시민들은 프랑스 실존주의 대철학자 사르트르와 똑같이 지금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세상의 온갖 지식과 부귀영화와 권력으로 으스대면서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큰 소리 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죽음에 직면하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떨면서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잠깐이라도 더 살기위해 발버둥 칠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 갇혀있는 강릉시민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줘야합니다.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는 곳은 강릉교회뿐입니다. 강릉시민들에게 천국의 소망의 복음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강릉시민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 하면 우리 책임입니다.
강릉시민들을 위해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64년 전에 강릉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눈물과 땀과 시간과 물질로 생명으로 충성, 헌신,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강릉 시민들의 구원을 위해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드로 사도에게 주셨던 복과 권세를 허락해주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7-19)
그렇게 강릉교회를 통해 수많은 강릉 시민들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가 참으로 복된 교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천국 열쇠를 받아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 하늘에서 풀리는 교회, 강릉시민들의 진정한 소망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