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0 창세기 4장 1-9절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형제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 만나게 하신 핏줄이자 하나님의 선물 중의 선물입니다. 

80억 인구 속에 형제자매가 몇 명이든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입니까? 


형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이웃 중의 이웃입니다.

형제와 이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내 사랑을 실험 실습하는 현장입니다. 내 믿음의 Workshop 대상입니다. 부모형제는 

믿음의 현장실습장입니다. 강릉가족, 가장 가까운 이웃인 옆 사람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실험실습 대상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맛보여줘야 할 가족이자 이웃 중의 이웃입니다.그런데 이 귀한 선물인 형제와 이웃을 적으로 간주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기위해서 반드시 꺾어버려야 할적<Enemy> 경쟁상대의 1순위가 형제, 이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용납하고, 이해하고, 서로 도와주며 주 안에서 화목하라.> 셨는데, 형제와 

이웃을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의 공동체, 교회 안에서도 미워하고, 시기하고, 험담하고, 욕하고, 원수처럼 대하는 겁니다.

 

아담 하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 맏아들

너무 기뻐서 이름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자를 얻었다.=가인>지었습니다. 둘째도 아들입니다. 이름을 <아벨 = 허망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 뜻입니다. 아담 하와가 맏아들을 낳았으니 둘째는 하와를 닮은 딸을 간절히 소원한 것 같습니다. 가인은 

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심과 불평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생이 태어나면 거의 모든 형과 누나들이 질투심

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 동안 독과점이었던 엄마 젖도 동생에게 빼앗기고, 관심도 빼앗기고, 사랑도 빼앗기고 모든 것에서 순위

로 뒤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맏아들 가인은 모든 기득권을 누리다가 하루아침에 아벨에게 다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까지도 맏아들에 대한 사랑과 특별대우는 여전합니다. <박탈감과 상실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가인은 호시탐탐 동생 아벨이 

없었으면 하는 미움과 분노의 게이지가 점점 올라갔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제사 -> 야훼 하나님.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목축업을 했습니다. 가인은 이름대로 농사를 지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키웠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아직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땅에서 나는 것

으로 양식을 삼을 때입니다. 육식은 노아 홍수 후에 허락하셨습니다. 아벨이 양을 키우는 목적은 부자도 아니고, 출세도 아니었습

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제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양을 키웠습니다.

 

레위기 제사법에 따르면 곡식은 감사제사의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풍성한 수확만을 빌며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드리는 가인의 제사를 열납 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양을 잡아 속죄의 피의 제사였기에 열납하셨습니다.

제사사건으로 가인의 분노는 더 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분노가 가득차면 이성적으로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빼앗긴 것

을 되찾아 와기 때문에 <약탈자 아벨을 없애버리면,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과 은혜와 복도 자기 독차

지 할 수 있다.> 환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을 죽이고 암매장 한 가인을 찾아오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 가장 가까운 이웃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찾아와서 율법의 지식을 자랑하는 청년 율법사에게 예수님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니 이웃이 누구입니

까? 질문하는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강도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사

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 너희 유대인들이 깔보고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의 선한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의 사람이라. 진정

한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리상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합니다. 거리가 멀면 이웃하기 쉽지 않습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 어쩌다 하는 사랑이기에 

하는 것이 좀 쉽습니다. 눈만 뜨면 만나는 사람을 매일 매순간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일입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내 교회, 우리 목사님, 장로님, 성도들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대하고, 기쁨으로 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다

음에 먼 사랑도 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은 찾아오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거리가 먼~ 미움과 시기는 사탄을 불러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욕하고 비난해도 살 수 있습니다. 원수들과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

님의 제자들이 세상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시험과 환란에 빠져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미워하면 저절

로 시험에 빠집니다. 서로 비난하고 욕하면 교회는 저절로 망합니다. 사탄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하지 않고 시기와 

질투로 사탄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교회가 맛을 잃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

 

사랑이 제자임을 증명합니다. 믿음을 증명합니다.

기도와 찬양, 나눔과 섬김, 헌금으로 믿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는 눈들이 있으니깐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할 수도 있습

니다. 하지만 사랑은 체면과 위신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진정성으로만 할수 있습니다. 야고보 목사님께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살아있기 때문에 꼼짝 안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허공을 향해서 주먹

질 하면서 몸부림치는 겁니다. 행동은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의 향기를 내고, 말을 하고, 몸짓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처럼 비겁하게, 무책임하게, 변명하고, 핑계대지 맙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딸, 믿음의 사람답게 책임있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 만나는 날 나에게 물으실 때, 가인처럼 무책임하게 변명, 핑계치 마시고 <말씀 따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다 왔습니다.> 믿음으로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는 믿음의 영웅, 사랑의 용장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